2007년 3월 30일 금요일

독소전 직전의 유럽 상황에 대한 소련의 시각 - B

B. Military Art during the Rout of Japanese Militarists
at the KhalKhin-Gol River (1939년 5월 28일-9월15일)

할힌-골 강 지역에 대한 일본의 공세 준비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Khasan 호수 일대의 도박이 실패로 끝난 후에 몽고 인민공화국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오랜 기간 안 호시탐탐 몽고를 노리고 있었으며, 그 이유는 몽고의 천연자원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중요성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공격적인 방침을 채택한 연후에 일본은 몽고를 소비에트령 아시아에 접근할 발판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몽고를 점령한다면, 소비에트의 바이칼 횡단 지역에 가장 가까운 통로를 확보하게 되는 셈으로서 이런 경우를 상정한다면, 극동의 소비에트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몽고에 대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야심은 그들이 만주와 내몽고를 점령한 직후(1931-33)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야심을 1935-36년 쯤 해서는 보다 강렬하게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우리 소비에트 정부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미리 내다보고, 이것은 보다 광범위한 군사적인 모험의 전주곡으로 간주하여, 우호국 몽골을 도와 일본의 침략을 격퇴하기로 결정했다. 1936년 3월에 우리 소비에트와 몽골 인민공화국 사이에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은 전력을 몽골 인민공화국에 전개시켰다. 제 57 특수 군단 - 제 36 차량화 저격 사단 - 제 11 전차 여단 - 제 7, 8, 9 차량화 화력 여단 (Armor brigades) - 제 6 기병 여단 - 혼성 항공 여단( 전투기 연대와 폭격기 연대의 혼성) - 82대의 항공기 ( 29 SBs, 15 R-5s, 24 I-16s, 14 I-15s) 지휘는 사단장을 역임했던 M.V Feklenko 가 군단전체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상황은 1939년 봄에 이르러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서방 제국들과 팟쇼 독일의 뮌헨에서의 야합이 이루어질 무렵 일본도 영향을 받으면서, 보다 과감한 행동들로 나타났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영미의 지원과 팟쇼 독일과의 동맹관계 속에서 아시아에서의 신질서를 만들겠다는 야욕에 불탔다. 그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세적 전쟁 전략에 따른 일선의 안정을 틈타서 새로운 도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할힌 골 강변 일대를 중심으로 우리 소비에트의 우호국인 몽골에 대한 선전포고 없는 형태의 전쟁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일본 호전주의자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 소비에트의 힘을 평가하고, 차후 우리 소비에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 대한 예비 테스트의 성격을 띤 것이다. 일본인들의 몽골에 대한 공격은 우리 소비에트에 대한 팟쇼 독일의 침략을 부추기는 도화선의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1939년이 시작되면서 몽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략 3개월 반 동안 그들은 30여 차례나 국경을 침범했다. 일본인들은 몽골 영토 내에서 밀고자의 조직을 확장하였고, 몽골과의 국경을 무시하는 거짓된 구획을 정한 지도를 만들어 냈다.

우리 소비에트는 우호국 몽골의 위기를 파악하고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모험주의와 긴장형성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39년이 시작되면서, 우리 소비에트는 1차 인민 대표 회의 3차 회기에서 소비에트 정부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일본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다. ‘우리는 몽골 인민 공화국의 국경을 수호할 것이다. 그것은 몽골과의 상화 원조조약에 근거한 군사동맹에 바탕한 것으로 우리 소비에트의 국경을 수호한다는 의지로 확고하게 선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이런 경고를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들은 1939년 5월부터 몽골 영토를 침범하기 시작했고, 초반의 이들의 행동은 동만주 일대의 관동군 주력이 우수리 강,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강 일대를 침범, Primorskii 일대를 기습점령하는 동안 몽골- 소비에트 지휘부의 주의를 돌리려는 양동작전의 소규모 전력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소비에트는 이러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불온한 의도를 간파하고, 미리 예지하고, 사사려깊게 내다본 결과 이들의 시도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우리 소비에트는 Khasan 사태 이후에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 하고자 극동지역에서의 군정을 중단하고, 2개 독립 야전군과 1개 북방 야전군을 인민 방위 평의회소속으로 주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곧 일본은 국경도발을 일삼고, 바다에서 소비에트 선박을 나포하는 등의 적대적 행위를 일삼아 우리 소비에트는 극동지역에 대한 방위력을 강화시키는 추가적인 조치에 나서게 되었다.

1939년 상반기 동안 우리 소비에트는 병력을 증강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대략 345000명의 병력으로 증강됐고, 이것은 원래 5개년 계획에서 구상된 57000명을 배치하는 계획을 대신한 것이다. 이들중 1/3은 극동으로 배치되었고, 그중 10500명은 트랜스 바이칼 군구로 배치되었으며, 12900명은 태평양 함대로 3000명은 몽골로 파견되어 특수 군단에 편입되었다. 할힌 골 강변 일대에서의 교전의 시작 ( 1939년 5월 28일-7월 25일) 동만주에서의 전략적 우위의 달성에 실패한 일본 관동군은 몽골로 목표를 바꾸기 시작했다.

5월의 마지막과 6울 초에 그들은 할힌-골 일대에서 적극적인 항공활동을 펼쳤으며,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항공 우위를 달성하려고 고집스런 시도를 반복했다. 이 당시 지상에서도 일본군과 몽골군 사이에 교전이 국경 초소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일본군은 제 2기 노몬한 사변이라는 이름하에 작전을 꾸미고 있었다. 상당한 전력이 몽골 국경에 배치되었고, 대략 38000명의 장병과 310문의 야포, 135대의 전차와 10대의 무장차량 225대의 항공기가 준비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을 기습하여, 포위/격파한 다음, 할힌 -골 강변을 도하하여 서안에 차후의 작전 거점을 위한 교두보를 형성할 예정이었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보병 3:1, 기병 4.5:1)를 확보한 다음 아군을 일시에 휩쓸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자신감에 넘친 나머지 외국 참관인을 초청하였으며, 그들은 대략 팟쇼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온 이들로, 이들에게 전투를 참관하고, 작전의 성과를 목격시키려 했다. 7월 2일 대략 1개 사단을 상회하는 전력의 일본군이 공세에 나섰다. 7월 3일 저녁까지 그들은 할힌 골 강변을 강행도하했다. 이에 맞서 소비에트-몽골 연합 지휘부는 가용한 모든 전력을 전투에 투입했다. 여기에는 전차 여단과 차량화 화력 여단이 투입되었고, 1개의 차량화 저격 여단과 1개 몽골 기병사단도 투입됐다. 3일간의 대규모 교전이 Baiian-Tsagan 산 일대에서 벌어졌고 대략 5000대의 전차와 무장차량, 300문 이상의 야포 수백 대의 항공기가 양편에서 동원되어 격돌했다.

일본침략자들의 충격군은 할힌 골 강변으로 되몰렸으며, 이들은 항공지원속에 계속되는 소비에트의 반격에 계속해서 쫒겨갔다. 전투에서 일본군은 모든 전차를 상실했고, 상당한 양의 야포를 잃었으며, 45대의 항공기가 격추되었고, 약 1만 명의 인명손실을 냈다. 그러나, 7월 8일 일본군은 휴식과 재편성 없이 다시 한번 대규모로 공격을 재개했다. 4일간의 혈전 끝에 일본군은 5500명의 전사상자를 내고 철수했고, 할힌-골 강변의 동안으로 도주하여, 수세에 몰렸다.

소비에트 장병과 지휘관 몽골 병사는 헌신적으로 일본 침략자들의 공격을 격퇴했고, 용감성과 영웅적인 투쟁으로 기적을 만들어냈다. A.A. Martynov 중위는 행군중에 그의 전차에서 5문의 일본군 야포를 격파했고, 그의 전차가 피격되어 전차포가 사용불능이 되자, 기관총으로 수개의 일본군 화력거점을 무력화시켰다.

정치장교 D.P. Viktorov 는 자신의 전투 차량에서 일본군 야포 10문을 격파했으며, 적의 전차에 피격되고 일본군에게 포위되어서도 숨을 거둘 때까지 사격을 계속했다. G.M. Mikhailov 소령은 전차 지휘관으로서 일본군의 후방 깊숙이 돌파를 이루어냈다. 그는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지휘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그의 부대를 훌륭히 지도했다.

몽골 영토내에서 2개월간의 혈전 속에 일본군은 도저히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없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상황이 유리해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1939년 8월의 대공세라는 이름 하에 아군에게 복수를 가해오려고 있다. 이 시기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시기로서, 일본 전쟁지도부는 유럽의 상황을 고려했음이 분명하다, 소련군도 유럽의 상황에 발이 묶인 입장이므로, 일본군은 대규모 공세를 편다면, 유럽과 아시아의 양면전쟁 속에서 소련군은 희망 없는 입장에서 항복하리라는 말도 안 되는 몽상을 했다.

약 한달간에 걸쳐 일본군은 새로운 부대를 증강해왔고, 제 6 야전군이라는 부대를 편성했다. 이 전력은 Ogisu Rippo 대장이 지휘하는 부대로 이전에 동원된 일본군의 전력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소비에트 몽골 연합군의 8월의 공세(1939년 8월 20일-30일) 현재까지 드러난 상황 속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그간 몽골 인민 공화국에 침략자들을 격퇴하고, 극동에서의 대규모 교전을 막아왔던 상황보다 보다 큰 개입을 하기로 결정했다. 8월의 중순까지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의 전력은 57000명의 병력에, 463대의 전차, 679문의 야포, 2390문의 기관총, 492대의 항공기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제 1 야전군은 군사 평의회 직속으로 G.K 주코프를 군단 지휘관으로, M.S Nikliuev 가 총 정치 책임장교를 맡고, 참모장으로는 여단장 M.A Bogdanov가 책임을 맡아, 1936년 6월 15일 발동된 주요 군사 평의회의 결의에 의거 가용한 수단과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몽골 측에서는 Choibolsan 원수가 몽골군의 지휘권을 행사했다.

극동소비에트 군과 몽골 국가 혁명군은 전선군 지휘 하에 전폭적으로 협력한 가운데, G.M Shtern 이 지휘를 맡고, 사단 정치 장교 N.I.Biriuk 와 M.A Kuznetsov가 참모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트랜스 바이칼 전선군은 몽골에서의 전투 수행에 필요한 모든 물자의 수송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의 임무는 일선에서 일본군의 움직임을 제어하여 고착시키고, 적의 양측면으로 2개의 주요 축선을 따라 강력한 반공을 개시하여, Nomon-Khan-Burd-Obo를 돌파하여, 국경지대인 Khalkhin-Gol 강변일대에서 적을 포위 격멸하는 내용이었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3개 전투 그룹이 편성되었다. 남쪽 그룹은 2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과 1개 차량화 화력 여단으로 구성되었고, M.I Potapov 대령이 지휘를 맡았고, 이들이 주공이었다. 북쪽에는 I.V Shevnikov 대량이 지휘를 맡아 2번째 공격축선을 이룰 예정이었고, 중앙부는 적의 주요 전력을 전선 전면부에 고착 기만하는 임무를 맡았다. 작전의 준비는 최대한 엄격한 보안 속에 이루어졌고, 적에 대한 Maskivoka 와 기만 전술이 최대한 사용되었다. 군단 지휘관 N.N Voronov 와 여단 지휘관 F.G Korzin 은 포병의 지휘를 관장했다.

모든 포병은 보병에 대한 대지 지원과 대 전차 지원으로 나누었고, 장사정 후방목표를 위한 임무도 별도 편성했다. 남부 충격 그룹에는 72문의 야포가 북부 그룹에는 36문 중앙부는 100문의 야포가 배당되었다. 포병과 보병은 최대한 협력체제를 이루도록 배려했다. 우리 소비에트는 공세에 앞서 항공우위를 점하기 위한 신중한 노력을 병행했다. 일본군이 5월과 6월에 누렸던 일시적인 우세는 급속히 소멸됐다. 이것은 특히 우리 소비에트의 최신예 항공기 I-16(세계 최초로 로켓병기를 사용했다.)과 I-153(Chaikas)기 등이 배치되고, 항공 군단장 V shushkevich가 지휘하는 스페인 내전과 중국 영공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우수한 조종사들이 배치되면서 항공우위는 더욱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정교한 통신망과 지휘체계를 구성하려는 세심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일선 부대에 대한 통합 지휘본부는 Khamar-Dava 산의 서방에 위치한 Khalkhin-Gol 강변에 설치되었다. 제 2선 참모진은 20킬로미터 후방에 위치했고, 후방 제대는 대략 120킬로미터 후방에 대기했다. 공병은 자연장애물과 작전 지형의 애로를 극복하기 위한 공사에 착수했다. 그들은 28개의 교량을 건설했고, 57개의 우물을 설치했고, 63개의 야전 비행장을 건설했고, 150킬로미터의 일선 도로를 개수했다. 후방의 지원업무부서도 다가올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의 공세를 원활하게 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수송업무는 트랜스 바이칼 군구에서 3275대의 트럭을 사용했고, 제 1 야전군에서도 2580대를 동원해 중간 기착지 없이 끊임없이 수송대열을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6-7회 공격분량의 포탄(항공부대의 경우 8-10회 분량) 5-6 POL의 연료, 16-18일분의 식량이 축적되어다.

준비기간동안 공격군의 평의회에서는 당-군대간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의 정신 전력강화에 역점을 두었다. 공격 개시시점까지 소비에트 군에서 1204명이 자발적으로 당에 입당했고, 1809명이 콤소몰에 가입했다. 모든 장병의 11퍼센트가 당원으로 구성되었다. 공세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일반 병사들을 독려하고, 모범이 되는 전위 부대도 소단위 별로 조직되었다.

공세는 8월 20일 일요일에 개시되었다. 엄격하게 작전 계획에 따른 것으로 오전 5시 45분에 153대의 폭격기가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일본군의 일선 진지에 맹렬한 폭격을 퍼부었고, 곧 야포 진지와 후방 병참 진지와 예비 진지로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6시 15분에는 포병의 준비사격이 2시간 반동안 지속되었다. 오전 9시에는 최종 15분간의 항공-포격이 이루어진 직후에 야전 이동 방송반에서 울려 퍼지는 인터내셔날 가의 장엄한 음향 속에 소비에트-몽골 군이 전차와 기병을 앞세우고 진격에 나섰다. 적들은 아군의 강력한 반격에 겁을 집어먹고 1시간 30분 동안이나 대응포격이나 단 1대의 항공 반격도 가해오지 못했다.

그날이 저물 무렵 아군의 공격은 대성공으로 판명났다. 특히 북부 공격 집단과 남부 공격 집단의 외곽에서 소비에트-몽골 기병은 일본군-Bargut 기병을 압도하며, 적 전선을 돌파 예정된 장소에 도달했다. 전선의 중앙부에서도 우리 연합군은 적 전선을 강하게 압박했다. 최종적인 성공은 Hill Palets(Fui)지역에서 달성되었다. 이곳은 북부 집단의 공격 시에 적들이 강하게 저항해온 곳으로 우리 소비에트는 I.A Sudak 소령이 제 601 저격 연대의 선두에서서 가장 치열한 상황에서 영웅적인 죽음으로서 부하들을 격려한 바로 그 지점이었다.

공세 첫날의 성과를 분석하고서, 제 1 야전군 지휘관과 군사 평의회는 모든 예비 병력을 북부 공격 축선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8월 21일 야간에 좌익으로 전력이 이동했고, 이들은 I.P Alekseenko 대령의 기동집단으로 배속되었다. 이들은 8월 23일까지 영웅적인 전투를 감행하여 Nomon-Khan-Burd-Obo에 도달했다. 그 다음날 제 9 차량화 장갑차 여단은 남쪽 그룹의 제 8 차량화 여단의 치열한 교전지로 돌입해 들어갔다.

이들은 남북 연합으로 일본군을 포위하고, 일본군이 국경너머로 도주할 통로를 차단해 버렸다. 8월 24일 일본군은 완패에서 일부 부대나마 구하려는 의도에서 예비대를 이동시켜 동쪽에서 공격하여,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다. 그러나 적들의 이러한 시도는 국경 부근에서 제 57 저격 사단 부대들의 강력한 반격에 가로막혔다. 제 127 저격 여단 지휘관 N.F Grhukin 소령은 치열한 근접전 속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분전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부대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영웅적인 투쟁과 부상에 대하여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고, 사후에 그에게 소연방 영웅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다.

제 80 저격 여단 지휘관 N. 자카로프 대령은 전투를 정교하게 지휘했고, 자신의 구역으로 감행된 일본군의 모든 공격을 격퇴했다. 포위망의 외선을 기병, 차량화 저격 부대, 전차, 항공부대로서 강화함과 동시에 포위된 일본군과 대치중인 포위망의 내선에서는 일선 저격 부대가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Zelenaia, Peschanaia, Palets(Fui), Remizov 외에 기타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를 확보한 라인으로 저항거점을 형성했다. 일본군주력을 포위하는 데는 불과 3일이 걸렸지만, 이들을 소탕하는 데는 1주일 이상 걸렸다.

소탕전에는 고도의 보/전 협동작전이 요구되었다. 또 경사면 너머 웅거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 직사 포격 외에도 정밀한 박격포 공격이 요구되었다. 항공 활동은 적의 예비 병력의 증원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적이 항공편으로 증원되는 수단을 차단했다. 8월 31일 적의 최종 저항거점이 일소되었다. 대규모의 충실한 장비를 갖춘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분쇄된 것이다.

Khalin-Gol 강변의 전투는 소비에트와 몽골 인민 공화군 간의 긴밀한 상호협조 하에 이루어진 작전으로서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한다는 공동목표 속에서 복잡다단한 작전/환경 속에서 이루어낸 성공이었고, 대규모 협동작전 능력을 보여준 쾌거였다. 반 사막화된 지형이라는 복잡한 전장환경 속에서 전투능력의 집결은 단기간 외에는 지속하기 어려웠고, 여기에 독립적으로 야전군단위의 거대한 작전을 감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매우 컸으나, 74킬로미터의 전선 전면과 20킬로미터의 종심을 11일 사이에 돌파한 이 군사적인 성공은 그때까지의 전사 상에 위대한 업적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작전의 형태와 환경 및 여타 지속기간 등은 정치적인 고려 속에 제한되었다. 그것은 일본군을 단지 몽골 영토 내에서 요격하는데 국한하였을 뿐이며, 보다 광범위한 전면전으로의 비화는 자제했다.

몽골에서 일본군은 60000명의 전사상자를 냈으며, 상당수의 포로가 발생했고, 660대의 항공기를 격추당했으며, 상당한 량의 군수물자를 상실했다.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은 소총 12000정을 노획하고, 200문의 야포를 노획했으며, 400문의 기관총도 획득했고, 100대의 차량을 얻었다. 이것은 일본군이 2년 반 동안 중국에서 잃은 손실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Khalkhin-Gol 강변의 포위전은 관동군에게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혔고, 지휘부 전원이 면직 조치되었다.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의 기대치 못한 영웅적인 행동과 과감하고, 수준 높은 전투 활동은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17121명의 소비에트 전사가 영웅의 칭호를 받았고, 그중 70명은 소연방 영웅이 되었다. 그중에 3명의 지휘관 V. Smushkevich, Kravchenko. Gritsevich 는 두 번이나 소연방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24개 단위 부대가 레닌 칭호와 적기 칭호를 받는 부대 표창을 받았다. 많은 몽골 장교와 사병들이 영웅적인 투쟁을 했다. L. Dandor, L. Galebator, Dugarzhav, Khaiankhiarvaa 가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소비에트 장병들의 깊은 애국심과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날리즘은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시점에서 공산당과 콤소몰 당원이 됨으로서 나타났다. 10230명의 조직에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8월 31일 포위된 일본군이 소탕되고, 몽골지역이 깨끗이 청소되었고,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은 수세로 전환하여 국경경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항공전은 상호간에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특히 8월 31일 대규모의 항공전이 벌어졌다. 아군은 126대의 항공기가 참전하여 일본군의 96대의 내습을 완벽하게 물리쳤다. 일본군은 22대나 격추당했다. 9월에도 하늘에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그칠 줄 몰랐다. 일본군은 하늘에서만은 우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9월 15일 가장 대규모의 항공전이 벌어졌다.

일본군 사령관은 가용한 모든 항공기를 집결시켜, 몽골 지역으로 내습했다. 적은 127대를 동원했고, 아군은 207대를 동원했다. 다시 한번 일본군은 20대의 항공기를 상실했고, 결국 몽골의 하늘을 포기했다. 적은 15일 동안 70대의 항공기를 상실한 것이다. 일본군이 전투에서 대패한 것이 명확해 지자 일본정부는 소비에트와 몽골에 강화를 요청하고, 적대 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청해왔다.

1939년 9월 16일 몽골 인민공화국의 동부 국경에 평화가 찾아왔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몽골 동부 국경에서 박살난 것과 동시에 이 사건은 전세계에 일대 반향을 몰고 왔다. 우리 소비에트의 위대한 힘을 전세계가 인지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극동에서 반 제국주의 투쟁을 보다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극동에서도 아시아판 뮌헨 체제를 획책하려는 일본의 의도는 여지없이 박살났고, 몽골과 소비에트를 자신들에게 흡수하려는 시도도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 참패는 일본의 외교 정책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대 조국 전쟁 기간내내 팟쇼 독일과의 협력에 소극적이었고, 자신들의 전술과 개념을 기초부터 재점검했던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동시대의 역사학자 D. Mcsherry는 다음과 같이 찬사했다. ‘ Khasan과 Khalkhin Gol 에서의 소비에트의 대승은 일본에 차후로도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으로 하여금 소비에트와의 전면전은 자신들에게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영국의 전사 연구가 M. Mackintosh 도 다음과 같이 찬사했다. ‘Khalkhin-Gol 일대에서의 소비에트의 위대한 승리는 팟쇼 독일이 감행한 1941년 6월의 공격에도 일본 정부가 협조하지 않은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Khalkhin-Gol 일대에서 1939년 8월에 감행된 소비에트-몽골의 공세는 새로운 전장환경 속에, 또 새로운 종심 전투에 대한 시각에서 공세를 준비하고, 진행한 우리의 군사적인 견해가 옳았음을 확고하게 증명해준 것이었다. 전차/ 장갑차/ 포병/ 항공의 제반 병과들의 협동 작전 같은 현재전의 개념이 적용되었다. 8월의 이러한 대첩은 각 병과들의 유기적인 결합에서 얻어진 성공이었고, 우리 소비에트 군은 속도전과 종심진지를 돌파하는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여기에 대 전차 화력과의 유기적인 협조는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전차도 보다 대구경의 화포와 강력한 무장과 장갑이 필수적이었다.

여기에 근접전을 확실히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보병의 정밀한 운용이 필요했다. 제 1 야전군 집단 지휘관의 적절한 판단은 작전의 성공을 보증해 주었다. 충격집단은 적의 취약한 양측 면에서 운용되었고, 이곳은 적의 전력 중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만주군과 Bargut 기병이 방어하던 곳이었다. 주공은 좌익으로 집중되었고, 적은 주력을 집중시키지 못한 지역이었으므로, 허를 찔린 것이다. 8월의 작전은 적에 대한 정교한 전술적 작전적 측면의 제병과에 대한 운용과 역동적인 항공 전력의 운용에 따른 사막 초원지대라는 지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성과이다.

이 성공은 훗날 대 조국 전쟁에서 우리 소비에트가 이룩한 성공의 초기 모델이라고 할수 있다. 공세기간 내내 운용된 전력은 적의 강력한 저항거점이나 적의 중심 방어거점에 대한 장기적인 전투를 상정하고 짜여진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진격 속에서 적을 각개 격파해 나가면서, 적을 포위해 가두어버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세심한 병참 태세는 작전의 성공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주의 깊은 보안조치로 인해 소비에트-몽골 지휘부는 적에게 작전적 측면은 물론 전술적인 면까지 완전한 기습을 달성한 것이다. Khalkhin-Gol 강변에서의 전투는 소련군에게 주요한 전술적 자산을 안겨 주었다. 여기에 우리 소비에트 병기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렸으며, 소비에트와 몽골전사의 용감성과 영웅적인 투쟁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39년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대한 압승의 결과 Khalkhin-Gol 전투 기장이 제작되어 우리 소비에트-몽골 참전자들에게 수여되었다. 몽골 정부는 전투 전적지 주변에 기념물을 건조했다.

이것은 1954년 8월 20일에 완공되었으며, ‘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맞서 인민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고자 Khalkhin-Gol 강변에서 전사한 모든 소비에트 병사들과 몽골 전사들에게 영광을 기린다’ 는 문구가 대리석에 양국 언어로 새겨져 양 형제국간의 우의를 다짐하고 있다. 레닌 동지와 SukheLator 동지 사이에 맺어진 소비에트-몽골간의 우의는 Khalkhin-Gol 일대에서 가혹한 시련의 시기를 거쳤다. 우리 소비에트는 형제국 몽골에 대한 국제적인 과중한 의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우리가 승리를 거두자 일본제국주의자와 맞서 싸우던 중국 인민들에게 자신들의 영토를 점령한 일본군에 대한 저항의지를 고취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 글은 적고나니 유럽 상황과는 거리가 멀어 제목이 무색하군요. 너그러이 양해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007년 3월 29일 목요일

독소전 직전의 유럽 상황에 대한 소련의 시각 - A

이글은 소련 총참모부에서 연구한 내용을 D. Glnatz씨가 영역한 내용으로 금일부터 연재할 내용은 대략 4개 정도의 주제가 있습니다. 본격적인 2차 대전의 직전에 뮌헨 협정 전후의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핀란드 전역, 폴란드 전역, 일본군과의 할힌 골 전투 등을 순전히 소련의 시각에서 입맛대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얼마나 객관적일는지는 저로서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이 워낙 공산주의자들이 떠드는 통계나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가 이 글속에서 소련군과 소련에 대해 상당히 조롱하는 듯한 시각이 내포될지도 모릅니다.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라고, 전체체제 하에서의 소련의 연구가 이렇듯 비 현실적이고 제논에 물대기 식의 멋대로의 해석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cerpt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r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 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Introduction

최근에 소련 군사 연구소와 문서 보관소 들은 그간 서구에서 접할 수 없었던 내용들의 저작과 보관 문서들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복원과 러시아와 서구 연구 기관, 정부, 일반 시민간의 상호 이해에 지대한 공헌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최근 해금된 문서 중에서 상당 부분은 소련군 보로실로프 군사 참모 대학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준비되고 연구된 것이다. 그중에 흥미있는 것 중에 하나가, 소련군 총참모부에서 펴낸 'The History of War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란 제목을 가진 1977년판 통사이다. 이 문서에서 그간 공개된 소련군의 문서들이 그러하듯 심하게 왜곡되어왔던 부분들에 대해 내용을 다루면서 발췌해 놓았다. 특히 이 내용에서는 1938년 체코에서의 위기와 1939년 일본군과의 할힌 골 전투, 1939-40년 사이의 폴란드와 베사라비아 전투 및 비슷한 시기의 핀란드 전역에서의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이것이 완전히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지는 못할지라도 2차대전 직전과 대전초기의 복잡다단한 군사적 발전에 관해 하나의 이정표로서의 역할은 한다고 생각된다.

David. M. Glantz The History of War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Measure of the Soviet Government to Render Military Assistance to Czechoslovakia (1938년 8월-10월)

소비에트 연방은 고도의 활력과 정열을 내뿜고 있었으며, 극동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팟쇼들의 책동을 제어하기 위해 정력적인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서유럽에서는 예상치못한 반동적인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속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와 스페인공화국에 대한 억압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극동에서는 수세적인 입장속에서도 몽고 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원은 전혀 줄이지 않았으며, 중국 인민들의 방어투쟁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럼에도 한편으로 유럽속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의 사태에 대해 모든 사태들의 과정과 결과를 확실히 제어할수 있는 대응적인 조치를 꾸준히 시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소비에트 정부는 조약에 의거하여 예견한대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을뿐만 아니라, 외교정책으로서 보다 공고한 개입의 의무를 확고히 하였다. 여기에 소비에트와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의 참모부 사이의 보다 공고한 접촉에 중점을 두어 1938년 3월에 이미 특수 군사 사절단을 체코슬로바키아에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소연방 원수 G.I, Kulik 원수를 사절단장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총참모부와 함께 독일군의 공격시에 효과적인 방어수단에 대해 공동으로 연구하였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러한 군사 사절단의 면담을 무시하였다. 영국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런던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을 히틀러에게 양도하게끔 강요하던 바로 그시기에 우리 소비에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항공지원을 준비하고 있었고, 여타 가용한 수단들을 동원하였으며, 가장 최신의 폭격기 제조 특허권을 양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소비에트의 팟쇼들의 책동을 격파하고자 시도된 여러 유기적이며, 정열적인 조치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시각에서는 지원의 의사가 전혀 없었으므로 무의미한 것으로 보여졌지만, 우리 소비에트 정부는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인 준비를 혼자서 하고 있었다. 1938년 7월 26일에 붉은 군대의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키에프와 벨라루스 일대를 특별 군사 전구로 지정하는 결정을 채택하였으며, 사령부를 바로 체코 슬로바키아 인근에 배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소련 인민 국방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소연방 원수 K.E 보로쉴로프 원수는 이러한 결정의 완성으로서 지토미르, 비니차, 오데사, 기병 집단의 4개 대 야전군 구성을 주장했고, 이는 곧 키에프 특별전구내에서 곧바로 시행되었다. 2개 야전군 비텝스크, 보브루이스크 는 벨라루스 특별전구에 형성되었다. 이런 소비에트의 노력은 1938년 9월 1일까지 완료되었다. 각 야전군의 작전 집단은 수개의 저격 사단, 전차 여단, 포병, 공병 소부대와 기타 지원부대로 구성되었다. 기병그룹은 강력한 대규모 기동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2개 기병군단과 전차, 포병, 공병 기타 지원병과를 망라하고 있었다. 대규모 야전군 편성당시 키에프와 벨라루스 특별전구에는 인원의 보충과, 장비, 탄약, 연료 모든 전투에 필요한 완전준비태세를 갖추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동시에 이들 특별전구 병력들의 전투에 대비한 대응태세를 고양시키기 위한 여타의 노력도 병행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원할 경우 군사적으로 지원하리라는 결정은 당시 소비에트 연방이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직접적인 국경접촉이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따라서, 보다 확고한 군사적인 지원을 적시에 제공하기 위해 소비에트 정부는 프랑스에 대해 폴란드와, 루마니아, 발틱국가들에게 외교적인 압력을 가해서 팟쇼 독일의 체코 침공에 대비해 적시에 체코를 구원할 수 있도록, 소비에트 군을 이들 국가의 영토 내에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체코 국경인근의 2개의 군사 전구는 특별군사전구로 변환되었다. 동시에 소련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1938년의 여름에 보다 현실적인 지원을 할수 있도록 최선의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소비에트의 이런 노력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다. 영국정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팟쇼 독일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침략자들에게 당근정책을 계속해서 폈던 것이다. 당중앙 군사 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는 서부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련이 사건들을 예의 주시했지만, 우방국 체코슬로바키아에 가해지려는 위해에 대해서 정확히 내다보는데 실패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은 그들 자신의 불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다 정열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것은 소비에트-체코슬로바키아 군사 동맹과 체코슬로바키아 노동자와 더불어 사회주의 동맹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소련군의 임무는 이제 완전히 전투 편성에 돌입해 대기상태에 들어갔으며, 필요시에는 언제든지 체코슬로바키아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치들을 시행하기 위해서 9월 21일 인민군사위원회는 키에프 특별전구 사령부에 유선으로 교시를 내렸다. 그것은 2개 대규모 야전군을 보다 국경근처로 이동하라는 것으로 2개 대 전투 집단과 기타 소규모 운용그룹을 Volochisk, Proskurov, Kamenets-Podol나, Novograd-Volinskii, Sheptovka 일대로 포진한다는 것이다.

그중의 일대는 비니차 야전군으로 이들은 제 17 저격 군단(제 72, 제 96, 제 97 저격 사단)과 제 23, 제 26 독립 경전차 여단, 제 25 전차 군단( 제 4, 제 5 전차여단, 제 1 차량화 저격여단) 과 제 4 기병군단(제 9, 제 32, 제 34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제 2 대는 지토미르 야전군으로 이들은 제 8, 제 15 저격군단(제 7, 제 44, 제 45, 제 46, 제 60, 제 81, 제 87 저격 사단)과 제 2 기병군단(제 3, 제 5, 제 14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각 저격 사단을 전시 편제로 증강하고자, 병력충원이 이루어졌고, 각 사단당 대략 8000명의 전투병력이 배치되었고, 사단의 수송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마필의 충원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여기에 영구 강화 진지에서 철도편으로 각 사단의 집결거점으로 병력 수송이 제안되었다. 3개 대전차 포병연대와 3개 고속 폭격기 연대와 1개 중폭격기 연대가 각 전투그룹에 배치되었다. 전투기들은 항공기지에서 전방으로 이동했다. 폭격기들은 영구기지에서 작전하도록 배려되었고, 착륙시에는 일시적으로 국경지대의 비행장을 이용할수 있도록 했다. 그 다음날 아침, 키에프 특별전구 사령관은 총참모부에 당 위원회의 교시가 새벽 4시까지 모든 병사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보고했고, 벌써 병사들은 전방의 집결지로 출발했다고 알려왔다. 특별 작전 세력을 지휘통제하기 위해 Semen Timosenko 대장이 지휘하는 지휘부가 키에프에서 Proskurov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충격군과, 전구 사령부, 모스크바간의 양방향 유선통신이 가설되어 있는 곳으로 최신의 통신장비와 조작요원들이 중앙에서 Proskurov로 참모들과 함께 파견되었다. 참모본부는 야전군 항공지휘관들에게 보로네즈 일대로 재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전력을 Belaia Tserkov와 우만 일대의 키에프 특별 전구 일대로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그럼으로서 이들 항공전력은 남서 방향의 육상전력을 보다 용이하게 지원할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전구 지휘관은 이러한 사실을 듣고서 항공부대 에 대한 연료와 탄약 지원에 만전을 기하기위한 조치들을 강구하게 되었다. 2일후에 인민 국방위원회와 총참모부는 벨로루스 특별전구에 대한 추가적인 지시를 내렸고, 새롭게 편성된 칼리닌 전구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명령을 발동했다. 이들에게는 대규모 야전 부대를 국경에 인접배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2개 야전군 그룹이 전투 경보 발령후에 벨라루스 전구에 증강되었다. 비텦스크 그룹은 폴롯츠크 그룹( 제 4 저격군단 (제 5, 제 50 저겨 사단, 제 18 전차 여단) 과 레펠 그룹 ( 제 27 저격 사단, 제 24 기병사단, 제 16 전차 여단) 과 보브루이스크 그룹(제 16 저격 군단 [제 2, 제 13, 제 00 저격 사단, 제 21 전차 여단])과 제 5 기병 군단(제 4, 제 7, 제 36 기병사단) 으로 구성되었다. 비텝스크 야전군 집단은 폴롯츠크 북서방으로 일단의 전력을 집결시켰고, 2번째 전력은 Begomlia, Berezino (Lepel의 서방)에 집결시켰다. 보브루이스크 전투 집단은 민스크 요새 구역을 점령하라는 명령과 이들 교외의 거점을 확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증강된 제 67 저겨 사단은 칼리닌 전구에서 차출되어 국경으로 이동했다. 9월 24일 오전에는 모든 일선부대가 자신에게 부여된 구역으로 이동해 배치되었다. 전투기와 폭격기들은 지상전력을 엄호하고 지원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전투기들은 Sebezh, Polotsk, Minsk, Slutsk 방향으로 일선비행장에 배치되었고, 경폭격기들은 Vitebsk, Orsha 일대에 중폭격기들도 영구 공군기지에서 일선으로 이동배치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선 지상전력과 항공전력에 더해서 국경을 따라 요새화된 지역과 일선 종심구역으로 야전 공병과 비행장 건설대대가 배치되었고, 비상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이들은 서부 국경 전구에 중점적으로 배치되었고, 보병의 일선 정찰도 강화되었고, 대공 방어 체계도 개선되었다. 24시간 당직 체제가 사령부와 통신 센터를 중심으로 확립되었고, 비슷한 조치가 모스크바와 하르코프 전구에서도 시행되었다. 모두 합해 다음과 같은 전력이 전투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1개 전차 군단 30개 저격 사단 10개 기병사단 12개 항공 여단 7개 요새화 수비대 방공부대는 다음과 같다. 2개 군단, 1개 사단, 2개 여단, 6개 대공 경보 연대, 4개 대공포 여단, 15개 대공포 연대 기타 보급 집적소와 기지 및 여타 후근 부대들이었다. 1938년 9월 25일에 소비에트 인민 국방위원회는 프랑스 군사 당국자들에게 상기 조치들의 일부를 알려주었다. 그는 파리에 소비에트는 이미 체코를 돕기 위한 주요한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1. 30개 저격 사단들이 서부 국경을 따라 증강 배치되었다. 2. 10 개 기병사단들도 같이 배치되었다. 3. 기타 전차와 항공부대들도 완전 전투 대비태세에 들어간 듯 하다.

1938년 9월 28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4 대표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를 배제하고, 우리 소비에트를 따돌린채 체코슬로바키아의 미래에 대해 불성실하고, 배반적인 회합을 가졌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은 이제 확정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긴장의 시기에 소련 정부는 아직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소비에트에 구원을 요청하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고, 붉은 군대 전군에 대비태세를 개선하고, 기동력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우리 소비에트는 시베리아, 트랜스바이칼, 극동 전구를 제외한 전 전구에 비상대기태세를 내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9월 28일에 총참모장 샤포슈니코프 원수는 붉은 군대 전군에 새로운 상황변화가 발생할 때까지 모든 장병들은 계급고하에 관계없이 전역이 금지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9월 29일 에는 레닌그라드 , 칼리닌, 벨로루시 특별 전구, 키에프 특별전구는 예비군을 전투 동원태세로 배치하고, 새롭게 17개 저격 사단, 3개 전차 군단, 22개 전차 여단, 3개 차량화 저격 여단, 34개 항공기지를 편성하라고 지시받았다. 같은날 모스크바와 칼리는, 하르코프, 오렐, 북 코카서스, 볼가, 우랄 전구의 군사 평의회는 각 사단별로 정치 장교를 증원하라고 지시받았고, 대략 250-275/ 사단 정도의 인원이었다. 새롭게 시행된 동원령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소비에트에 파견된 프랑스군 연락관들에게도 알려졌다.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기 위한 소비에트의 노력은 국경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랄과 볼가를 잇는 유럽러시아 전체가 동원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당-정치국사이의 유기적인 연결과 지역 군구와 사령부, 하급제대간의 폭넓으면서, 유기적인 연결시스템과 광범위한 대비태세가 완비되었다. 일선의 모든 부대들이 전투 대비태세를 갖추고 국경을 따라 배치되고, 즉각적인 반응태세를 당과 정부의 지도아래 갖추었다. 소비에트 정부와 군사위원회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고자 하는 형제애적인 노력은 범국가적인 거대한 것이었다. 여기에 남서부와 서부 국경에 제 2선 병력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30개 저격 사단, 6개 기병사단, 2개 전차 군단, 15개 독립 전차 여단, 34개 항공기지등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도합 33만명의 예비병력이 지휘, 정치, 초급등의 부서로 나뉘어 야전 전력으로 배치되었다. 여기에 각자의 지역에서 복무하던 수십만의 초급장교들의 전역이 중단되었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이 가깝던 키에프 특별전구에는 인원과 수송물자 항공전력의 두드러지게 보강되었다.

1938년 가을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뮌헨에서 4개국 거두들이 야합한 비열한 결정을 거부할 힘이 있었다. 그들의 국민과 군, 소비에트의 지원뿐만이 아니라, 팟쇼를 거부하는 전세계적인 인민들은 모두 체코 정부가 독일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국가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싸워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실제 팟쇼 독일과 체코의 전력을 비교해 보아도 체코가 전혀 밀릴게 없었다. 팟쇼 독일은 청색 계획에 따라 그들이 보유한 47개 사단 병력중에 39개 사단을 체코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에 반해 45개 사단 약 200만의 병력을 동원할수 있었고, 500대의 전투기가 있었으며, 47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4200-5700문의 각종구경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체코의 병사들은 팟쇼 독일의 침략에 대비해 견고한 국경 요새 구역을 의지해 싸울수 있었다. 팟쇼들이 침략한다면, 체코는 히틀러가 계산에 넣지 못한 또 하나의 잇점이 있었다. 이것은 체코군의 정신적인 우월감이다. 모든 체코 인민들과 장군들, 말단 병사들까지 자신들을 노예화 하려는 팟쇼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1938년 9월 23일 22시에 동원령이 선포되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체코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예비군 병영으로 모여들었다. 동원령은 계획에 따라 엄격하게 이루어졌고, 9월 29일에 완료되었다. 나치들이 구상한 폴란드와 헝가리를 체코에 대한 전쟁에 끌어들인다는 것도 전혀 근거없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 장군들에게 체코에 대한 나치의 계획은 하나의 기회가 아니라 하나의 재앙일 것이라 인식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근거로서 나치 수괴중의 한명인 카이텔은 전후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우리는 군사적인 행동을 취할 어떤 예비 전력이 없었다. 우리는 체코의 요새지대를 돌파할 전력이 전무했다. 여기에 우리는 서부 국경에 전혀 병력이 없었다.’ 고 증언했다.

강력한 군대와 체코슬로바키아 인민의 저항의지에도 불구하고, 또 형제국가를 돕는다는 소비에트의 성의에도 아랑곳 없이 부패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부르조아 정부는 국가의 이익을 버리고, 뮌헨에서의 제국주의자들의 야합에 굴복해버렸다. 이것은 반 국가적이며, 반 소비에트적인 체코슬로바키아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소비에트와 통하는 통로를 닫아 버리고, 나치가 자신들의 국가를 점령할 통로를 활짝 열어버리는 배신행위를 자행했다. 그럼에도 우리 소비에트 군대는 1938년 10월까지 형제국가인 체코를 돕기위해 국경에 주둔하다가, 철군해서 영구진지로 돌아왔다. 당연히 체코 민중은 비열한 정부의 결정에 만족하지 않았다. 체코 공산당은 팟쇼에 대한 굴복을 거부하고, 만장일치로 소비에트군과 함께 독일에 투쟁한다고 선언했다.

뮌헨에서의 야합과 굴복은 1938년 봄에 팟쇼 독일과 이탈리아의 일련의 침략행위로서 유럽에 결과를 드러냈다. 스페인 공화국의 억압, 체코의 완전병합, 메멜의 탈취, 팟쇼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점령, 루마니아에 대한 독일의 일방적인 경제 수탈로 이어졌고, 이것은 유럽대륙 전체에 전쟁에 대한 전주곡으로 공포의 전야를 예고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