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29일 목요일

독소전 직전의 유럽 상황에 대한 소련의 시각 - A

이글은 소련 총참모부에서 연구한 내용을 D. Glnatz씨가 영역한 내용으로 금일부터 연재할 내용은 대략 4개 정도의 주제가 있습니다. 본격적인 2차 대전의 직전에 뮌헨 협정 전후의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핀란드 전역, 폴란드 전역, 일본군과의 할힌 골 전투 등을 순전히 소련의 시각에서 입맛대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얼마나 객관적일는지는 저로서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이 워낙 공산주의자들이 떠드는 통계나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가 이 글속에서 소련군과 소련에 대해 상당히 조롱하는 듯한 시각이 내포될지도 모릅니다.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라고, 전체체제 하에서의 소련의 연구가 이렇듯 비 현실적이고 제논에 물대기 식의 멋대로의 해석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cerpt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r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 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Introduction

최근에 소련 군사 연구소와 문서 보관소 들은 그간 서구에서 접할 수 없었던 내용들의 저작과 보관 문서들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복원과 러시아와 서구 연구 기관, 정부, 일반 시민간의 상호 이해에 지대한 공헌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최근 해금된 문서 중에서 상당 부분은 소련군 보로실로프 군사 참모 대학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준비되고 연구된 것이다. 그중에 흥미있는 것 중에 하나가, 소련군 총참모부에서 펴낸 'The History of War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란 제목을 가진 1977년판 통사이다. 이 문서에서 그간 공개된 소련군의 문서들이 그러하듯 심하게 왜곡되어왔던 부분들에 대해 내용을 다루면서 발췌해 놓았다. 특히 이 내용에서는 1938년 체코에서의 위기와 1939년 일본군과의 할힌 골 전투, 1939-40년 사이의 폴란드와 베사라비아 전투 및 비슷한 시기의 핀란드 전역에서의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이것이 완전히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지는 못할지라도 2차대전 직전과 대전초기의 복잡다단한 군사적 발전에 관해 하나의 이정표로서의 역할은 한다고 생각된다.

David. M. Glantz The History of War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Measure of the Soviet Government to Render Military Assistance to Czechoslovakia (1938년 8월-10월)

소비에트 연방은 고도의 활력과 정열을 내뿜고 있었으며, 극동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팟쇼들의 책동을 제어하기 위해 정력적인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서유럽에서는 예상치못한 반동적인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속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와 스페인공화국에 대한 억압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극동에서는 수세적인 입장속에서도 몽고 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원은 전혀 줄이지 않았으며, 중국 인민들의 방어투쟁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럼에도 한편으로 유럽속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의 사태에 대해 모든 사태들의 과정과 결과를 확실히 제어할수 있는 대응적인 조치를 꾸준히 시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소비에트 정부는 조약에 의거하여 예견한대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을뿐만 아니라, 외교정책으로서 보다 공고한 개입의 의무를 확고히 하였다. 여기에 소비에트와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의 참모부 사이의 보다 공고한 접촉에 중점을 두어 1938년 3월에 이미 특수 군사 사절단을 체코슬로바키아에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소연방 원수 G.I, Kulik 원수를 사절단장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총참모부와 함께 독일군의 공격시에 효과적인 방어수단에 대해 공동으로 연구하였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러한 군사 사절단의 면담을 무시하였다. 영국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런던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을 히틀러에게 양도하게끔 강요하던 바로 그시기에 우리 소비에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항공지원을 준비하고 있었고, 여타 가용한 수단들을 동원하였으며, 가장 최신의 폭격기 제조 특허권을 양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소비에트의 팟쇼들의 책동을 격파하고자 시도된 여러 유기적이며, 정열적인 조치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시각에서는 지원의 의사가 전혀 없었으므로 무의미한 것으로 보여졌지만, 우리 소비에트 정부는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인 준비를 혼자서 하고 있었다. 1938년 7월 26일에 붉은 군대의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키에프와 벨라루스 일대를 특별 군사 전구로 지정하는 결정을 채택하였으며, 사령부를 바로 체코 슬로바키아 인근에 배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소련 인민 국방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소연방 원수 K.E 보로쉴로프 원수는 이러한 결정의 완성으로서 지토미르, 비니차, 오데사, 기병 집단의 4개 대 야전군 구성을 주장했고, 이는 곧 키에프 특별전구내에서 곧바로 시행되었다. 2개 야전군 비텝스크, 보브루이스크 는 벨라루스 특별전구에 형성되었다. 이런 소비에트의 노력은 1938년 9월 1일까지 완료되었다. 각 야전군의 작전 집단은 수개의 저격 사단, 전차 여단, 포병, 공병 소부대와 기타 지원부대로 구성되었다. 기병그룹은 강력한 대규모 기동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2개 기병군단과 전차, 포병, 공병 기타 지원병과를 망라하고 있었다. 대규모 야전군 편성당시 키에프와 벨라루스 특별전구에는 인원의 보충과, 장비, 탄약, 연료 모든 전투에 필요한 완전준비태세를 갖추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동시에 이들 특별전구 병력들의 전투에 대비한 대응태세를 고양시키기 위한 여타의 노력도 병행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원할 경우 군사적으로 지원하리라는 결정은 당시 소비에트 연방이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직접적인 국경접촉이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따라서, 보다 확고한 군사적인 지원을 적시에 제공하기 위해 소비에트 정부는 프랑스에 대해 폴란드와, 루마니아, 발틱국가들에게 외교적인 압력을 가해서 팟쇼 독일의 체코 침공에 대비해 적시에 체코를 구원할 수 있도록, 소비에트 군을 이들 국가의 영토 내에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체코 국경인근의 2개의 군사 전구는 특별군사전구로 변환되었다. 동시에 소련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1938년의 여름에 보다 현실적인 지원을 할수 있도록 최선의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소비에트의 이런 노력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다. 영국정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팟쇼 독일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침략자들에게 당근정책을 계속해서 폈던 것이다. 당중앙 군사 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는 서부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련이 사건들을 예의 주시했지만, 우방국 체코슬로바키아에 가해지려는 위해에 대해서 정확히 내다보는데 실패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은 그들 자신의 불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다 정열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것은 소비에트-체코슬로바키아 군사 동맹과 체코슬로바키아 노동자와 더불어 사회주의 동맹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소련군의 임무는 이제 완전히 전투 편성에 돌입해 대기상태에 들어갔으며, 필요시에는 언제든지 체코슬로바키아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치들을 시행하기 위해서 9월 21일 인민군사위원회는 키에프 특별전구 사령부에 유선으로 교시를 내렸다. 그것은 2개 대규모 야전군을 보다 국경근처로 이동하라는 것으로 2개 대 전투 집단과 기타 소규모 운용그룹을 Volochisk, Proskurov, Kamenets-Podol나, Novograd-Volinskii, Sheptovka 일대로 포진한다는 것이다.

그중의 일대는 비니차 야전군으로 이들은 제 17 저격 군단(제 72, 제 96, 제 97 저격 사단)과 제 23, 제 26 독립 경전차 여단, 제 25 전차 군단( 제 4, 제 5 전차여단, 제 1 차량화 저격여단) 과 제 4 기병군단(제 9, 제 32, 제 34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제 2 대는 지토미르 야전군으로 이들은 제 8, 제 15 저격군단(제 7, 제 44, 제 45, 제 46, 제 60, 제 81, 제 87 저격 사단)과 제 2 기병군단(제 3, 제 5, 제 14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각 저격 사단을 전시 편제로 증강하고자, 병력충원이 이루어졌고, 각 사단당 대략 8000명의 전투병력이 배치되었고, 사단의 수송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마필의 충원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여기에 영구 강화 진지에서 철도편으로 각 사단의 집결거점으로 병력 수송이 제안되었다. 3개 대전차 포병연대와 3개 고속 폭격기 연대와 1개 중폭격기 연대가 각 전투그룹에 배치되었다. 전투기들은 항공기지에서 전방으로 이동했다. 폭격기들은 영구기지에서 작전하도록 배려되었고, 착륙시에는 일시적으로 국경지대의 비행장을 이용할수 있도록 했다. 그 다음날 아침, 키에프 특별전구 사령관은 총참모부에 당 위원회의 교시가 새벽 4시까지 모든 병사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보고했고, 벌써 병사들은 전방의 집결지로 출발했다고 알려왔다. 특별 작전 세력을 지휘통제하기 위해 Semen Timosenko 대장이 지휘하는 지휘부가 키에프에서 Proskurov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충격군과, 전구 사령부, 모스크바간의 양방향 유선통신이 가설되어 있는 곳으로 최신의 통신장비와 조작요원들이 중앙에서 Proskurov로 참모들과 함께 파견되었다. 참모본부는 야전군 항공지휘관들에게 보로네즈 일대로 재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전력을 Belaia Tserkov와 우만 일대의 키에프 특별 전구 일대로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그럼으로서 이들 항공전력은 남서 방향의 육상전력을 보다 용이하게 지원할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전구 지휘관은 이러한 사실을 듣고서 항공부대 에 대한 연료와 탄약 지원에 만전을 기하기위한 조치들을 강구하게 되었다. 2일후에 인민 국방위원회와 총참모부는 벨로루스 특별전구에 대한 추가적인 지시를 내렸고, 새롭게 편성된 칼리닌 전구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명령을 발동했다. 이들에게는 대규모 야전 부대를 국경에 인접배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2개 야전군 그룹이 전투 경보 발령후에 벨라루스 전구에 증강되었다. 비텦스크 그룹은 폴롯츠크 그룹( 제 4 저격군단 (제 5, 제 50 저겨 사단, 제 18 전차 여단) 과 레펠 그룹 ( 제 27 저격 사단, 제 24 기병사단, 제 16 전차 여단) 과 보브루이스크 그룹(제 16 저격 군단 [제 2, 제 13, 제 00 저격 사단, 제 21 전차 여단])과 제 5 기병 군단(제 4, 제 7, 제 36 기병사단) 으로 구성되었다. 비텝스크 야전군 집단은 폴롯츠크 북서방으로 일단의 전력을 집결시켰고, 2번째 전력은 Begomlia, Berezino (Lepel의 서방)에 집결시켰다. 보브루이스크 전투 집단은 민스크 요새 구역을 점령하라는 명령과 이들 교외의 거점을 확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증강된 제 67 저겨 사단은 칼리닌 전구에서 차출되어 국경으로 이동했다. 9월 24일 오전에는 모든 일선부대가 자신에게 부여된 구역으로 이동해 배치되었다. 전투기와 폭격기들은 지상전력을 엄호하고 지원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전투기들은 Sebezh, Polotsk, Minsk, Slutsk 방향으로 일선비행장에 배치되었고, 경폭격기들은 Vitebsk, Orsha 일대에 중폭격기들도 영구 공군기지에서 일선으로 이동배치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선 지상전력과 항공전력에 더해서 국경을 따라 요새화된 지역과 일선 종심구역으로 야전 공병과 비행장 건설대대가 배치되었고, 비상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이들은 서부 국경 전구에 중점적으로 배치되었고, 보병의 일선 정찰도 강화되었고, 대공 방어 체계도 개선되었다. 24시간 당직 체제가 사령부와 통신 센터를 중심으로 확립되었고, 비슷한 조치가 모스크바와 하르코프 전구에서도 시행되었다. 모두 합해 다음과 같은 전력이 전투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1개 전차 군단 30개 저격 사단 10개 기병사단 12개 항공 여단 7개 요새화 수비대 방공부대는 다음과 같다. 2개 군단, 1개 사단, 2개 여단, 6개 대공 경보 연대, 4개 대공포 여단, 15개 대공포 연대 기타 보급 집적소와 기지 및 여타 후근 부대들이었다. 1938년 9월 25일에 소비에트 인민 국방위원회는 프랑스 군사 당국자들에게 상기 조치들의 일부를 알려주었다. 그는 파리에 소비에트는 이미 체코를 돕기 위한 주요한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1. 30개 저격 사단들이 서부 국경을 따라 증강 배치되었다. 2. 10 개 기병사단들도 같이 배치되었다. 3. 기타 전차와 항공부대들도 완전 전투 대비태세에 들어간 듯 하다.

1938년 9월 28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4 대표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를 배제하고, 우리 소비에트를 따돌린채 체코슬로바키아의 미래에 대해 불성실하고, 배반적인 회합을 가졌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은 이제 확정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긴장의 시기에 소련 정부는 아직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소비에트에 구원을 요청하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고, 붉은 군대 전군에 대비태세를 개선하고, 기동력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우리 소비에트는 시베리아, 트랜스바이칼, 극동 전구를 제외한 전 전구에 비상대기태세를 내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9월 28일에 총참모장 샤포슈니코프 원수는 붉은 군대 전군에 새로운 상황변화가 발생할 때까지 모든 장병들은 계급고하에 관계없이 전역이 금지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9월 29일 에는 레닌그라드 , 칼리닌, 벨로루시 특별 전구, 키에프 특별전구는 예비군을 전투 동원태세로 배치하고, 새롭게 17개 저격 사단, 3개 전차 군단, 22개 전차 여단, 3개 차량화 저격 여단, 34개 항공기지를 편성하라고 지시받았다. 같은날 모스크바와 칼리는, 하르코프, 오렐, 북 코카서스, 볼가, 우랄 전구의 군사 평의회는 각 사단별로 정치 장교를 증원하라고 지시받았고, 대략 250-275/ 사단 정도의 인원이었다. 새롭게 시행된 동원령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소비에트에 파견된 프랑스군 연락관들에게도 알려졌다.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기 위한 소비에트의 노력은 국경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랄과 볼가를 잇는 유럽러시아 전체가 동원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당-정치국사이의 유기적인 연결과 지역 군구와 사령부, 하급제대간의 폭넓으면서, 유기적인 연결시스템과 광범위한 대비태세가 완비되었다. 일선의 모든 부대들이 전투 대비태세를 갖추고 국경을 따라 배치되고, 즉각적인 반응태세를 당과 정부의 지도아래 갖추었다. 소비에트 정부와 군사위원회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고자 하는 형제애적인 노력은 범국가적인 거대한 것이었다. 여기에 남서부와 서부 국경에 제 2선 병력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30개 저격 사단, 6개 기병사단, 2개 전차 군단, 15개 독립 전차 여단, 34개 항공기지등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도합 33만명의 예비병력이 지휘, 정치, 초급등의 부서로 나뉘어 야전 전력으로 배치되었다. 여기에 각자의 지역에서 복무하던 수십만의 초급장교들의 전역이 중단되었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이 가깝던 키에프 특별전구에는 인원과 수송물자 항공전력의 두드러지게 보강되었다.

1938년 가을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뮌헨에서 4개국 거두들이 야합한 비열한 결정을 거부할 힘이 있었다. 그들의 국민과 군, 소비에트의 지원뿐만이 아니라, 팟쇼를 거부하는 전세계적인 인민들은 모두 체코 정부가 독일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국가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싸워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실제 팟쇼 독일과 체코의 전력을 비교해 보아도 체코가 전혀 밀릴게 없었다. 팟쇼 독일은 청색 계획에 따라 그들이 보유한 47개 사단 병력중에 39개 사단을 체코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에 반해 45개 사단 약 200만의 병력을 동원할수 있었고, 500대의 전투기가 있었으며, 47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4200-5700문의 각종구경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체코의 병사들은 팟쇼 독일의 침략에 대비해 견고한 국경 요새 구역을 의지해 싸울수 있었다. 팟쇼들이 침략한다면, 체코는 히틀러가 계산에 넣지 못한 또 하나의 잇점이 있었다. 이것은 체코군의 정신적인 우월감이다. 모든 체코 인민들과 장군들, 말단 병사들까지 자신들을 노예화 하려는 팟쇼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1938년 9월 23일 22시에 동원령이 선포되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체코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예비군 병영으로 모여들었다. 동원령은 계획에 따라 엄격하게 이루어졌고, 9월 29일에 완료되었다. 나치들이 구상한 폴란드와 헝가리를 체코에 대한 전쟁에 끌어들인다는 것도 전혀 근거없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 장군들에게 체코에 대한 나치의 계획은 하나의 기회가 아니라 하나의 재앙일 것이라 인식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근거로서 나치 수괴중의 한명인 카이텔은 전후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우리는 군사적인 행동을 취할 어떤 예비 전력이 없었다. 우리는 체코의 요새지대를 돌파할 전력이 전무했다. 여기에 우리는 서부 국경에 전혀 병력이 없었다.’ 고 증언했다.

강력한 군대와 체코슬로바키아 인민의 저항의지에도 불구하고, 또 형제국가를 돕는다는 소비에트의 성의에도 아랑곳 없이 부패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부르조아 정부는 국가의 이익을 버리고, 뮌헨에서의 제국주의자들의 야합에 굴복해버렸다. 이것은 반 국가적이며, 반 소비에트적인 체코슬로바키아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소비에트와 통하는 통로를 닫아 버리고, 나치가 자신들의 국가를 점령할 통로를 활짝 열어버리는 배신행위를 자행했다. 그럼에도 우리 소비에트 군대는 1938년 10월까지 형제국가인 체코를 돕기위해 국경에 주둔하다가, 철군해서 영구진지로 돌아왔다. 당연히 체코 민중은 비열한 정부의 결정에 만족하지 않았다. 체코 공산당은 팟쇼에 대한 굴복을 거부하고, 만장일치로 소비에트군과 함께 독일에 투쟁한다고 선언했다.

뮌헨에서의 야합과 굴복은 1938년 봄에 팟쇼 독일과 이탈리아의 일련의 침략행위로서 유럽에 결과를 드러냈다. 스페인 공화국의 억압, 체코의 완전병합, 메멜의 탈취, 팟쇼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점령, 루마니아에 대한 독일의 일방적인 경제 수탈로 이어졌고, 이것은 유럽대륙 전체에 전쟁에 대한 전주곡으로 공포의 전야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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