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9일 수요일
제 3차 하르코프 공방전 9-2
제 48 기갑군단.
SS 사단들이 파블로 그라드 일대를 소탕하는 동안 제 4 기갑군 소속 제 6, 17 기갑사단은 SS 기갑군단의 진격로와 평행한 방향으로 북진을 개시했다. 이들은 공격중에 동쪽으로 리시찬스크 남쪽에서 서쪽으로 로조바야 일대까지 광범위하게 포진한 소련 제 1 근위군 전초부대와 충돌했다. 로조바야에는 소련제 58 근위 저격 사단이 머물렀고, 로조바야에서 바르벤코보까지 40킬로미터의 광범위한 지역은 제 195 저격 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제 195 저격 사단은 슬라비얀스크 일대의 격전에서 발생한 심각한 병력손실에 시달리고 있었고, 광범위한 전면을 방어할 만큼 전력이 미치치 못했다. 제 3 전차 군단은 일대의 예비 전력이었고, 작전 가능한 전차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제 1 근위군은 동서 축선을 따라 포진해 있었고, 전반적으로 남쪽을 전방 방어선으로 정한 상태에서 사단별 배열이 이루어져 있었다. 야전군의 남측은 독일 제 1 기갑군의 제 40 기갑군단의 공격으로 붕괴되고 있었고,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의 방어선에서 밀려나 있었다. 제 44 근위 저격 사단은 바르벤코보에서 크라마토르스크 사이의 25킬로미터의 책임 방어구역을 맡고 있었고, 바르벤코보에 주둔한 제 10 전차군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다른 2개 사단은 슬라비얀스크 일대를 맡고 있었고, 제 52, 78 저격 사단은 야전군 일선의 최외곽에 포진해 있었다.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예비전력은 전무한 상태였고, 탄약 보급은 매우 저조한 상태였다. 야전군의 여러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독일 제 48 기갑군단의 일선 돌파와 소련 제 6군 측면 방어에 있어 핵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즉 소련 제 6군의 전선 전면은 서방을 향해있고, 제 1 근위군과는 직각을 이루는 두면을 가진 위치관계였다.
독일군 공격의 우안에 위치한 제 17 기갑사단은 전력이 다소 미약한 2개의 전위제대들로 구성되었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파블로그라드 동쪽 25킬로미터 지점의 사마라 강변에 도달했고, 가용한 전차와 돌격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파블로그라드를 통과한 이후 사마라 강은 북쪽으로 흐름이 바뀌어 페트로파블로프카 시가지로 향하고 있었다. 2월 23일까지 사단은 페트로파블로프카에 도달했고, 2개 야전 교량을 건설했다. 그 사이 제 6 기갑사단은 사마라 강변데 도달하여 보구슬라프 마을로 진입했고, 이 지점은 파블로그라드 10킬로미터 지점이었다. 오후까지 사단은 도하를 완료했고, 인근마을에서 소련 보병들과 격렬한 전투에 돌입했다.
보다 동방으로 제 1 기갑군의 제 40 기갑군단이 예하 3개 사단을 이끌고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에서 발진하여 북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SS 비킹 사단과 , 제 1, 11기갑사단은 평행한 대열로 슬라비얀스크 동방을 가로질러 나갔다. 전선의 너머지 구역을 따라 북도네츠 강의 남안으로는 제 3 기갑군단과 프레터 피코의 제 30군단이 슬라비얀스크에서 보로쉴로프그라드 서방까지 100킬로미터의 방어구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가장 우측면은 크라이싱 전투단과 총통연대 소속 증강 1개 대대가 보로실로프그라드 직서방에서 남쪽으로 굽어진 전면을 따라 포진했다. 크라이싱 전투단의 이웃은 제 335 보병사단이었고, 이들은 소련군 제 60 근위 저격사단과 대치중이었다. 소련군은 마주보는 독일군에 비해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지만, 동계전역내내 전투를 벌여나오면서, 전력은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이들 양군사이에 치열한 교전은 중지된 상태였고, 일차적인 대치상황은 상호모두 순찰과 포격정도였다.
마켄젠의 제 1 기갑군의 서방은 제 333보병사단이 버티고 있었고, 크라마토르스크를 장악하고 있었다. 제 3 기갑사단과 제 19 기갑사단은 전선의 잔여구역을 담당하고 있었고, 슬라비얀스크에서 페르보마이스크까지 였으며, 대략 70킬로미터의 거리였다. 보로실로프그라드 남쪽은 홀리트 분견군이 미우스강 너머로 연속적인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고, 제 30군단의 우측단과는 90도 각도로 양변을 이루는 상태였다. 이 무렵 소련군의 대규모 공격도 잦아든 상태였는데, 지난주의 격전으로 양측 모두 탈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2월 24일까지 독일군은 캠프 집단의 남동방면과 제 1기갑군의 서측면사이에 형성된 2개의 갭을 메우는 견고한 라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제 1 기갑군은 슬라비얀스크에서 크라마토르스크로 이르는 돌출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여왔고, 이제는 제 4 기갑군을 주력으로 감행될 반격에 있어 공고한 발진기지로서의 위치를 점할수 있었다. 예하 기갑사단들의 전력은 매우 취약했지만, 무거운 짐은 호트의 SS 사단들이 덜어주고 있었다. 공격은 바로 그시점에 감행되었다. 소련군은 계속된 전력소모로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고, 보급이 매우 불량했으며, 지휘부의 판단착오라는 문제점을 떠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이토록 보잘것 없었던 독일군 기갑사단들이 막상 반격에 나섰을 때 효과적인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포포프 기동집단의 파멸.
(The Destruction of Mobile Group Popov)
소련 제 6군과 제 1 근위군의 전위제대들이 뿔뿔이 분산된채 살길을 찾아 독일군의 대열을 돌파하려 노심초사할 무렵 포포프 기동집단은 로조바야와 슬라비얀스크를 잇는 철도선을 방어할 준비에 착수했다. 진격해오는 독일군에 맞선 소련군의 기본적인 방어선은 이 철도선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 이 시점에 이르자 소련군 지휘부에도 독일군의 반격은 제 6군의 옆구리 뿐만 아니라, 제 1 근위군의 주력과 포포프 기동집단의 좌익마저 위협한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다.
포포프 예하의 전차 군단들은 2월말까지 전력이 감소되면서, 각 군단마다 15대에서 20대 남짓한 전차만 가동하고 있었다. 비록 독일군 제 40 기갑군단소속 기갑사단과 비교하면, 전차 댓수는 그나마 나았지만, 독일군이 구사하는 제병협동작전 능력이 결여된 상태였다. 가령 소련 전차 군단에서 공병이 남아돌면, 임시급조로 대공포나 여분의 로켓발사 조작요원으로 편성시켜 전투서열에 배치하는 식이었다. 이에 반해 독일군은 제병협동조직을 확실히 갖추고 있었다. 기갑연대에 더불어 돌격포 대대는 독일군 사단에 실질적 전력을 증강시키는 효과를 불러왔고, 공격시에는 보병돌격을 근접지원했고, 수세로 돌아설때도 유효한 역할을 다했다. 하프트랙과 각종 무장 차량, 수륙양용차를 장비한 수색대대는 만능이었다. 자주포,대전차포, 대공포를 갖춘 대대도 공수양면에 있어서, 어디든 써먹을 수 있었다. 덧붙여 독일사단의 각급 예하 부대들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편성병력을 다양한 규모로 차출하여, 전투단을 구성해 특화된 임무집단으로 활용가능했다. 이런 능력이 독일 기갑사단을 보다 유연하면서 단순히 기갑연대의 화력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원동력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독일 기갑사단들은 작전가능한 전차가 사단당 50대를 넘지 못했다.
양적 차이를 떠나서, 지휘관의 자질과 전술적 숙련도, 통신에 있어서도 양군의 실력차가 존재했다. 독일군 전차병의 능력은 소련군의 그것을 대체로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독일군 전차 지휘관들은 유연하면서도 공격적이고, 전투 상황에 따라 자신의 판단하에 주도권을 갖고, 임무를 완수하도록 훈련받았다. 소련군 전차 지휘관들은 상대적으로 행동의 자유가 없었고, 단순한 명령의 복종/완수와 보다 경직된 방식의 훈련과정을 거쳤다. 적어도 이러한 차이가 전쟁 첫해에 소련 전차부대가 겪어야 했던 엄청난 인명손실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단서가 될 듯하다. 이런 인명손실은 필연적으로 작전에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훈련된 전차병과 지휘관의 부족을 불러왔다.
소련측의 두 번째 취약점은 통상적으로 많은 전차들에 무선통신이 부재했다는 점이고, 그저 전차중대나 대대지휘관 전차 정도에나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일선 전차제대의 지휘관들은 일단 교전이 벌어지면, 자신의 부하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소련의 전차 공격은 전장의 상황에 상관없이 대개 일렬로 늘어선 단순 공격이 대부분이었다. 소련식 편제에서는 전차간의 효과적인 통신이 불가능했으므로, 전술자체가 단순, 경직, 상상력 부재라는 특징이 지워질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독일군 전차 지휘관들은 자신의 예하의 어떤 위치의 승무원과도 의사전달과 교환이 가능한 무선통신과 전차내 인터콤을 완비했다. 이런 이유에서 독일 전차 지휘관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전장환경에 따라 즉각적인 반응은 물론 예하 전차들의 방향전환도 신속히 할수 있었다. 소련군의 이러한 경직성은 T-34가 독일군의 3호, 4호 전차보다 여러면에서 압도적인 성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개전초기 엄청난 손실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소련 전차에 미비점은 또 찾아볼수 있다. T-34는 단단하고, 균형이 잘 잡힌 경사장갑을 채용한 방어력과 훌륭한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최초 실전 무대에서 발견된 기술적 결함이 존재했다. 최초 모델은 전차장 큐폴라가 없었다. 따라서, 전차장이 포탑속으로 몸을 숨기면, 외부를 잘 볼수 없었다. 반면 독일 전차는 매우 세련된 큐폴라와 잠망경이 존재했고, 전차장은 상대적으로 엄중히 몸이 보호되는 안전한 상태에서도, 360도 외부 관찰이 가능했다. 무전기 유무를 제외하고, 소련전차의 가장 두드러진 단점을 꼽으라면, 포탑 디자인일 것이다.
독일의 3호와 4호 전차의 포탑에는 포수, 지휘관, 장전수 3명이 머물 공간이 있었으나, 초기 T-34는 2명이 있기도 복잡한 구조였다. 그래서 소련의 전차장은 교전이 벌어지면, 포수의 임무를 도와야만 했고, 적 전차의 위치나 전차의 이동방향을 지시하기 힘들었고, 자연스레 전투통제 능력의 감소를 불러왔다. 반대로 독일군 전차장은 전장에서 전차의 기동방향에 대한 임무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개전 첫해 소련군의 지휘능력과 기술적 결함들은 압도적인 수량의 전차숫자로 어느정도는 상쇄될 수 있었다. 거대한 소련의 군수공장들은 1945년 종전시까지 대략 4만대에서 5만대에 이르는 T-34를 생산해 냈다. 반면 독일은 1939년에서 종전시까지 모든 종류를 합해서 3만대 남짓한 전차를 생산해 냈을 뿐이다.
그러나, 포포프는 더 이상 숫적 우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예하 4개 전차 군단들은 불과 수십대의 전차만 보유했고, 차량화 보병의 부족은 물론, 탄약도 심각하게 부족했다. 포포프예하의 지친 전차병들과 보병들은 자신들에게 밀려드는 독일군의 흐름을 막아내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제 40 기갑군단소속 3개 기갑사단이 공세에 나서 북진하자, 일선을 커버하던 엷은 보병위주의 방어망이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이렇듯 절망적인 상황에서 전차 군단은 슬라비얀스크 북서부의 제 6군 연결라인을 지켜 낼 수 없었다. 따라서, 포포프의 공세가 차량화 보병의 부족, 보급 부족, 탄약, 포병의 부족으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소련군 수뇌부는 아직도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고, 자신들에게 밀려드는 전장의 흐름이 급격히 불리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여 알지 못했다.
포포프가 바투틴에게 자신의 괴멸된 기동집단을 북쪽으로 후퇴하도록 허용해 달라고 보고했을때, 바투틴은 포포프를 매우 심하게 문책했다. 그는 포포프에게 만일 북쪽으로 후퇴한다면, 독일군이 드네프르페트로프스크와 드네프르 강으로 쉽게 후퇴하게 허용하는 꼴이 된다고 주장했다. 바투틴은 포포프에게 주어진 임무 -즉 독일군이 드네프르 강으로 후퇴하는 길목을 차단하라는 -를 완수하라고 모욕적으로 명령했다. 포포프는 이미 고갈된 전력으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펼침은 물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전투를 준비해야만 했다. 스타브카가 괜히 걱정하는 독일군이 드네프르 강으로 후퇴한다는 고민은 도저히 포포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였다.
스타브카는 독일군의 의도를 오판했을 뿐만 아니라, 왜 포포프의 공격이 실패한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충실한 심복이자, 스타브카 참모이면서 작전대리인은 포포프의 실패의 원인을 ‘ 열성적으로’ 공격하지 않은데 일차적인 이유가 있다고 힐난했다. 포포프는 자신의 후퇴요구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이제는 독일군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우울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2월 21일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 일대에서 최후로 소련군을 우회한 이후 제 7 기갑사단은 마을의 북쪽 강화거점에 대한 돌격에 들어갔다. 이 지점은 도브로폴예 남쪽이었다. 마을과 주변은 소련군 제 10, 18 전차군단의 잔존병력이 머물러 있었다. 독일군은 포포프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무선통신을 도청함으로서 이미 알고 있었다. 포포프는 후퇴를 요구했던 것이다. 포포프는 도브로폴예에서 병력을 빼서 스테파노프카 남쪽으로 재배치하려 했다. 그곳에서 제 3 전차군단과 연결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넨코의 제 3 전차군단도 이미 독일군 제 11 기갑사단의 발크 전투단으로부터의 심각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발크는 제 3 전차군단을 강하게 압박하여, 현 위치에서 묶어두고, 이들이 도브로폴예로 후퇴하여 나머지 2개 전차군단과 합류하는 것을 차단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발크가 스테파노프카 일대에서 시넨코의 병력을 봉쇄하는 동안 비킹과 제 7 기갑사단은 크라스노아르케이스코예를 지나쳐서, 바르벤코보 남쪽과 남동쪽의 소련군 진지선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것은 소련군이 페트로파블로프카에서 사마라 강을 도하하는 것을 차단하고, 제 1 기갑군의 측면을 기습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제 40 기갑군단은 이런 결과는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페트로파블로프카 의 사마라강 교량 확보는 제 1 기갑군에게 있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비쳤다.
제 40 기갑군단의 3개 기갑사단은 2월 23일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 일대의 소련군을 뒤따르는 제 333 보병사단에게 소탕임무를 맡기고, 서로 평행하게 북으로 전진했다. 독일군은 다수의 T-34를 노획하고, 많은 전쟁물자를 소각했으며, 마을들을 소탕했다고 보고했다. 소탕작전이 종료되자, 사단의 주력은 크리보이 토레츠 강의 서안 방어를 넘기기 위해서, 제 3 기갑군단의 방어구역으로 넘어갔다.
2월 22-23일 동안 발크 전투단은 결정적인 공격에 나서서, 북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스테파노프카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부터 도시로 진입해 들어갔다. 이 것은 소련 제 3 전차군단의 퇴로를 차단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다음날 이들을 뒤따라서, 비킹이 서쪽과 서남쪽에서 공격해 들어가고, 제 7 기갑사단은 남쪽으로부터 스테파노프카로 통하는 가도상에서 진격해 들어갔다. 소련군 포로의 진술에 따르자면 그곳에는 제 18 전차군단, 차량화 저격 여단, 고사포병, 스키병 과 제 57 저격 여단이 있었다. 제 11 기갑사단의 전투단은 공격을 지속했고, 북으로 밀고 들어가 바르벤코보에 도달했고, 그 사이 나머지 2개 사단은 소련군을 포위해 마을의 외곽으로부터 조여들어갔다. 수시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비킹사단은 남서방향으로부터 마을 중심부로 진입해 들어갔지만, 소련 패잔병들은 격렬한 저항을 계속했다. 오후 늦게 제 7 기갑사단이 소련 제 3 근위 전차 군단의 반격을 격퇴시켰다. 이들은 포위망을 뚫고 포위된 병력과 합세하려던 자들이었다.
2월 24일 내내 스테파노프카 일대에서는 전투가 지속되었다. 비킹과 제 7 기갑사단은 천천히 마을 중심부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집집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제 11 기갑사단은 도시를 완전히 우회하여, 바르벤코보로 직행했다. 도시의 남쪽 능선에 막 도착할 무렵 발크는 소련군 전차들을 발견하고, 기습적으로 공격에 들어갔다. 독일군의 현란한 전차 기동에 소련전차들은 대열에서 분리되면서, 격파되었다. 곧 재편성 연후에 바르벤코보로의 진격이 속개되었다. 발크는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소련군이 사태를 파악하기 이전에 도시로 진입하고자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경계태세에 들어갔고, 참호를 잘 준비하고 있었고, 늘 그래왔듯 바르벤코보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고 있었다. 소련군에 대한 기습이 실패하자, 제 11 기갑사단은 다음날 아침에 공격을 재개하기로 하고, 병력을 일선에서 뒤로 물렸다.
이당시 소련군의 무선통신은 보안에 매우 취약했고, 제 1기갑군은 종종 소련군 무선을 도청하고,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 그중 상당수는 포포프 사령부에서 직접 송출되는 무선이었다. 독일군은 메시지들을 파악하고 최대한 귀중한 정보를 습득했다. 포포프는 자신의 잔여 전력을 바르벤코보에 집중시킬 것이 명확해졌고, 그의 1차적인 임무는 제 40 기갑군단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이 될 터였다. 바투틴으로부터 하달된 명령도 독일군에게 간파당했다. 독일군은 소련 남서 전선군이 모든 가용한 병력을 바르벤코보-슬라비얀스크-이줌 일대로 집결시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라인을 지켜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증원병력이 동쪽으로부터 접근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병력 이동과 배치의 목적은 소련군 수뇌부가 하르코프 -슬라비얀스크 일대의 공격작전은 이미 불가능 한 것으로 보고, 제 1 근위군과 제 6군의 후퇴로를 열어놓는데 있었음도 파악하게 되었다.
스테파노프카 일대의 소련군 최후의 저항은 제 7 기갑사단의 기갑척탄병에 의해 2월 24일 심야에 종식되었다. 비킹은 재편성 이후에 소탕전은 국방군 사단에 맡기고 사마라 강변의 계곡방향으로 이동했다. SS 사단의 선도대는 페트로파블로프카에서 사마라 강변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제 17 기갑사단 병력과 조우했다. 비킹과 협력하여, 제 17 기갑사단은 소련군을 북으로 구축했고, 사마라 강을 건너 후퇴할 것을 강요해다. 포포프 집단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음은 물론, 잔여 병력도 전면 수세로 내몰렸다.
제 40기갑군단은 성공적으로 지난 21일간의 치열한 격전을 마무리 지었고, 제 1 기갑군 서측면에서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적 5개 전차군단의 공격을 받아쳐냈고,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반격에 참가했다. 지난 3주간 소련군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시켰다. 자체 추산으로 251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하고, 17대의 무장 차량, 73문의 야포, 135문의 대전차포를 격파하고, 475대의 기타 차량을 파괴하거나, 노획했다. 소련군의 인명손실은 3000명의 전사자와 569명의 포로였다. SS 기갑군단과 제 48 기갑군단이 북진하여 하르코프 탈환을 위해 재편성 되는 동안, 제 40 기갑군단은 소련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예비대를 투입하기 이전에 이줌과 북도네츠 강변까지 돌파할 목표를 품게 되었다. 위협적이던 포포프의 전력을 소탕하면서 하우써의 SS 기갑군단은 자신들의 목표를 판주틴과 로조바야 진격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제 4 기갑군과 제 1 기갑군의 기갑사단들은 공격시에 어깨를 맞대듯 평행하게 나아갔고, 서쪽으로 파블로 그라드, 동쪽으로 슬라비얀스크로 전선을 확대해 나갔다. 하우써의 SS 사단들이 선봉에 나서, 북진을 준비하며, 하르코프로 방향을 전환하면, 일련의 공격이 가해지면서, 이들은 대기하던 캠프의 도마위에 소련군을 올려다 놓고 내려치는 망치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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