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9일 수요일

제 3차 하르코프 공방전 9-2


제 48 기갑군단.

SS 사단들이 파블로 그라드 일대를 소탕하는 동안 제 4 기갑군 소속 제 6, 17 기갑사단은 SS 기갑군단의 진격로와 평행한 방향으로 북진을 개시했다. 이들은 공격중에 동쪽으로 리시찬스크 남쪽에서 서쪽으로 로조바야 일대까지 광범위하게 포진한 소련 제 1 근위군 전초부대와 충돌했다. 로조바야에는 소련제 58 근위 저격 사단이 머물렀고, 로조바야에서 바르벤코보까지 40킬로미터의 광범위한 지역은 제 195 저격 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제 195 저격 사단은 슬라비얀스크 일대의 격전에서 발생한 심각한 병력손실에 시달리고 있었고, 광범위한 전면을 방어할 만큼 전력이 미치치 못했다. 제 3 전차 군단은 일대의 예비 전력이었고, 작전 가능한 전차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제 1 근위군은 동서 축선을 따라 포진해 있었고, 전반적으로 남쪽을 전방 방어선으로 정한 상태에서 사단별 배열이 이루어져 있었다. 야전군의 남측은 독일 제 1 기갑군의 제 40 기갑군단의 공격으로 붕괴되고 있었고,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의 방어선에서 밀려나 있었다. 제 44 근위 저격 사단은 바르벤코보에서 크라마토르스크 사이의 25킬로미터의 책임 방어구역을 맡고 있었고, 바르벤코보에 주둔한 제 10 전차군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다른 2개 사단은 슬라비얀스크 일대를 맡고 있었고, 제 52, 78 저격 사단은 야전군 일선의 최외곽에 포진해 있었다.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예비전력은 전무한 상태였고, 탄약 보급은 매우 저조한 상태였다. 야전군의 여러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독일 제 48 기갑군단의 일선 돌파와 소련 제 6군 측면 방어에 있어 핵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즉 소련 제 6군의 전선 전면은 서방을 향해있고, 제 1 근위군과는 직각을 이루는 두면을 가진 위치관계였다.
독일군 공격의 우안에 위치한 제 17 기갑사단은 전력이 다소 미약한 2개의 전위제대들로 구성되었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파블로그라드 동쪽 25킬로미터 지점의 사마라 강변에 도달했고, 가용한 전차와 돌격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파블로그라드를 통과한 이후 사마라 강은 북쪽으로 흐름이 바뀌어 페트로파블로프카 시가지로 향하고 있었다. 2월 23일까지 사단은 페트로파블로프카에 도달했고, 2개 야전 교량을 건설했다. 그 사이 제 6 기갑사단은 사마라 강변데 도달하여 보구슬라프 마을로 진입했고, 이 지점은 파블로그라드 10킬로미터 지점이었다. 오후까지 사단은 도하를 완료했고, 인근마을에서 소련 보병들과 격렬한 전투에 돌입했다.
보다 동방으로 제 1 기갑군의 제 40 기갑군단이 예하 3개 사단을 이끌고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에서 발진하여 북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SS 비킹 사단과 , 제 1, 11기갑사단은 평행한 대열로 슬라비얀스크 동방을 가로질러 나갔다. 전선의 너머지 구역을 따라 북도네츠 강의 남안으로는 제 3 기갑군단과 프레터 피코의 제 30군단이 슬라비얀스크에서 보로쉴로프그라드 서방까지 100킬로미터의 방어구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가장 우측면은 크라이싱 전투단과 총통연대 소속 증강 1개 대대가 보로실로프그라드 직서방에서 남쪽으로 굽어진 전면을 따라 포진했다. 크라이싱 전투단의 이웃은 제 335 보병사단이었고, 이들은 소련군 제 60 근위 저격사단과 대치중이었다. 소련군은 마주보는 독일군에 비해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지만, 동계전역내내 전투를 벌여나오면서, 전력은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이들 양군사이에 치열한 교전은 중지된 상태였고, 일차적인 대치상황은 상호모두 순찰과 포격정도였다.
마켄젠의 제 1 기갑군의 서방은 제 333보병사단이 버티고 있었고, 크라마토르스크를 장악하고 있었다. 제 3 기갑사단과 제 19 기갑사단은 전선의 잔여구역을 담당하고 있었고, 슬라비얀스크에서 페르보마이스크까지 였으며, 대략 70킬로미터의 거리였다. 보로실로프그라드 남쪽은 홀리트 분견군이 미우스강 너머로 연속적인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고, 제 30군단의 우측단과는 90도 각도로 양변을 이루는 상태였다. 이 무렵 소련군의 대규모 공격도 잦아든 상태였는데, 지난주의 격전으로 양측 모두 탈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2월 24일까지 독일군은 캠프 집단의 남동방면과 제 1기갑군의 서측면사이에 형성된 2개의 갭을 메우는 견고한 라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제 1 기갑군은 슬라비얀스크에서 크라마토르스크로 이르는 돌출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여왔고, 이제는 제 4 기갑군을 주력으로 감행될 반격에 있어 공고한 발진기지로서의 위치를 점할수 있었다. 예하 기갑사단들의 전력은 매우 취약했지만, 무거운 짐은 호트의 SS 사단들이 덜어주고 있었다. 공격은 바로 그시점에 감행되었다. 소련군은 계속된 전력소모로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고, 보급이 매우 불량했으며, 지휘부의 판단착오라는 문제점을 떠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이토록 보잘것 없었던 독일군 기갑사단들이 막상 반격에 나섰을 때 효과적인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포포프 기동집단의 파멸.
(The Destruction of Mobile Group Popov)


소련 제 6군과 제 1 근위군의 전위제대들이 뿔뿔이 분산된채 살길을 찾아 독일군의 대열을 돌파하려 노심초사할 무렵 포포프 기동집단은 로조바야와 슬라비얀스크를 잇는 철도선을 방어할 준비에 착수했다. 진격해오는 독일군에 맞선 소련군의 기본적인 방어선은 이 철도선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 이 시점에 이르자 소련군 지휘부에도 독일군의 반격은 제 6군의 옆구리 뿐만 아니라, 제 1 근위군의 주력과 포포프 기동집단의 좌익마저 위협한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다.
포포프 예하의 전차 군단들은 2월말까지 전력이 감소되면서, 각 군단마다 15대에서 20대 남짓한 전차만 가동하고 있었다. 비록 독일군 제 40 기갑군단소속 기갑사단과 비교하면, 전차 댓수는 그나마 나았지만, 독일군이 구사하는 제병협동작전 능력이 결여된 상태였다. 가령 소련 전차 군단에서 공병이 남아돌면, 임시급조로 대공포나 여분의 로켓발사 조작요원으로 편성시켜 전투서열에 배치하는 식이었다. 이에 반해 독일군은 제병협동조직을 확실히 갖추고 있었다. 기갑연대에 더불어 돌격포 대대는 독일군 사단에 실질적 전력을 증강시키는 효과를 불러왔고, 공격시에는 보병돌격을 근접지원했고, 수세로 돌아설때도 유효한 역할을 다했다. 하프트랙과 각종 무장 차량, 수륙양용차를 장비한 수색대대는 만능이었다. 자주포,대전차포, 대공포를 갖춘 대대도 공수양면에 있어서, 어디든 써먹을 수 있었다. 덧붙여 독일사단의 각급 예하 부대들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편성병력을 다양한 규모로 차출하여, 전투단을 구성해 특화된 임무집단으로 활용가능했다. 이런 능력이 독일 기갑사단을 보다 유연하면서 단순히 기갑연대의 화력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원동력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독일 기갑사단들은 작전가능한 전차가 사단당 50대를 넘지 못했다.
양적 차이를 떠나서, 지휘관의 자질과 전술적 숙련도, 통신에 있어서도 양군의 실력차가 존재했다. 독일군 전차병의 능력은 소련군의 그것을 대체로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독일군 전차 지휘관들은 유연하면서도 공격적이고, 전투 상황에 따라 자신의 판단하에 주도권을 갖고, 임무를 완수하도록 훈련받았다. 소련군 전차 지휘관들은 상대적으로 행동의 자유가 없었고, 단순한 명령의 복종/완수와 보다 경직된 방식의 훈련과정을 거쳤다. 적어도 이러한 차이가 전쟁 첫해에 소련 전차부대가 겪어야 했던 엄청난 인명손실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단서가 될 듯하다. 이런 인명손실은 필연적으로 작전에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훈련된 전차병과 지휘관의 부족을 불러왔다.
소련측의 두 번째 취약점은 통상적으로 많은 전차들에 무선통신이 부재했다는 점이고, 그저 전차중대나 대대지휘관 전차 정도에나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일선 전차제대의 지휘관들은 일단 교전이 벌어지면, 자신의 부하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소련의 전차 공격은 전장의 상황에 상관없이 대개 일렬로 늘어선 단순 공격이 대부분이었다. 소련식 편제에서는 전차간의 효과적인 통신이 불가능했으므로, 전술자체가 단순, 경직, 상상력 부재라는 특징이 지워질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독일군 전차 지휘관들은 자신의 예하의 어떤 위치의 승무원과도 의사전달과 교환이 가능한 무선통신과 전차내 인터콤을 완비했다. 이런 이유에서 독일 전차 지휘관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전장환경에 따라 즉각적인 반응은 물론 예하 전차들의 방향전환도 신속히 할수 있었다. 소련군의 이러한 경직성은 T-34가 독일군의 3호, 4호 전차보다 여러면에서 압도적인 성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개전초기 엄청난 손실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소련 전차에 미비점은 또 찾아볼수 있다. T-34는 단단하고, 균형이 잘 잡힌 경사장갑을 채용한 방어력과 훌륭한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최초 실전 무대에서 발견된 기술적 결함이 존재했다. 최초 모델은 전차장 큐폴라가 없었다. 따라서, 전차장이 포탑속으로 몸을 숨기면, 외부를 잘 볼수 없었다. 반면 독일 전차는 매우 세련된 큐폴라와 잠망경이 존재했고, 전차장은 상대적으로 엄중히 몸이 보호되는 안전한 상태에서도, 360도 외부 관찰이 가능했다. 무전기 유무를 제외하고, 소련전차의 가장 두드러진 단점을 꼽으라면, 포탑 디자인일 것이다.
독일의 3호와 4호 전차의 포탑에는 포수, 지휘관, 장전수 3명이 머물 공간이 있었으나, 초기 T-34는 2명이 있기도 복잡한 구조였다. 그래서 소련의 전차장은 교전이 벌어지면, 포수의 임무를 도와야만 했고, 적 전차의 위치나 전차의 이동방향을 지시하기 힘들었고, 자연스레 전투통제 능력의 감소를 불러왔다. 반대로 독일군 전차장은 전장에서 전차의 기동방향에 대한 임무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개전 첫해 소련군의 지휘능력과 기술적 결함들은 압도적인 수량의 전차숫자로 어느정도는 상쇄될 수 있었다. 거대한 소련의 군수공장들은 1945년 종전시까지 대략 4만대에서 5만대에 이르는 T-34를 생산해 냈다. 반면 독일은 1939년에서 종전시까지 모든 종류를 합해서 3만대 남짓한 전차를 생산해 냈을 뿐이다.
그러나, 포포프는 더 이상 숫적 우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예하 4개 전차 군단들은 불과 수십대의 전차만 보유했고, 차량화 보병의 부족은 물론, 탄약도 심각하게 부족했다. 포포프예하의 지친 전차병들과 보병들은 자신들에게 밀려드는 독일군의 흐름을 막아내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제 40 기갑군단소속 3개 기갑사단이 공세에 나서 북진하자, 일선을 커버하던 엷은 보병위주의 방어망이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이렇듯 절망적인 상황에서 전차 군단은 슬라비얀스크 북서부의 제 6군 연결라인을 지켜 낼 수 없었다. 따라서, 포포프의 공세가 차량화 보병의 부족, 보급 부족, 탄약, 포병의 부족으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소련군 수뇌부는 아직도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고, 자신들에게 밀려드는 전장의 흐름이 급격히 불리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여 알지 못했다.
포포프가 바투틴에게 자신의 괴멸된 기동집단을 북쪽으로 후퇴하도록 허용해 달라고 보고했을때, 바투틴은 포포프를 매우 심하게 문책했다. 그는 포포프에게 만일 북쪽으로 후퇴한다면, 독일군이 드네프르페트로프스크와 드네프르 강으로 쉽게 후퇴하게 허용하는 꼴이 된다고 주장했다. 바투틴은 포포프에게 주어진 임무 -즉 독일군이 드네프르 강으로 후퇴하는 길목을 차단하라는 -를 완수하라고 모욕적으로 명령했다. 포포프는 이미 고갈된 전력으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펼침은 물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전투를 준비해야만 했다. 스타브카가 괜히 걱정하는 독일군이 드네프르 강으로 후퇴한다는 고민은 도저히 포포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였다.
스타브카는 독일군의 의도를 오판했을 뿐만 아니라, 왜 포포프의 공격이 실패한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충실한 심복이자, 스타브카 참모이면서 작전대리인은 포포프의 실패의 원인을 ‘ 열성적으로’ 공격하지 않은데 일차적인 이유가 있다고 힐난했다. 포포프는 자신의 후퇴요구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이제는 독일군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우울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2월 21일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 일대에서 최후로 소련군을 우회한 이후 제 7 기갑사단은 마을의 북쪽 강화거점에 대한 돌격에 들어갔다. 이 지점은 도브로폴예 남쪽이었다. 마을과 주변은 소련군 제 10, 18 전차군단의 잔존병력이 머물러 있었다. 독일군은 포포프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무선통신을 도청함으로서 이미 알고 있었다. 포포프는 후퇴를 요구했던 것이다. 포포프는 도브로폴예에서 병력을 빼서 스테파노프카 남쪽으로 재배치하려 했다. 그곳에서 제 3 전차군단과 연결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넨코의 제 3 전차군단도 이미 독일군 제 11 기갑사단의 발크 전투단으로부터의 심각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발크는 제 3 전차군단을 강하게 압박하여, 현 위치에서 묶어두고, 이들이 도브로폴예로 후퇴하여 나머지 2개 전차군단과 합류하는 것을 차단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발크가 스테파노프카 일대에서 시넨코의 병력을 봉쇄하는 동안 비킹과 제 7 기갑사단은 크라스노아르케이스코예를 지나쳐서, 바르벤코보 남쪽과 남동쪽의 소련군 진지선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것은 소련군이 페트로파블로프카에서 사마라 강을 도하하는 것을 차단하고, 제 1 기갑군의 측면을 기습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제 40 기갑군단은 이런 결과는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페트로파블로프카 의 사마라강 교량 확보는 제 1 기갑군에게 있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비쳤다.
제 40 기갑군단의 3개 기갑사단은 2월 23일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 일대의 소련군을 뒤따르는 제 333 보병사단에게 소탕임무를 맡기고, 서로 평행하게 북으로 전진했다. 독일군은 다수의 T-34를 노획하고, 많은 전쟁물자를 소각했으며, 마을들을 소탕했다고 보고했다. 소탕작전이 종료되자, 사단의 주력은 크리보이 토레츠 강의 서안 방어를 넘기기 위해서, 제 3 기갑군단의 방어구역으로 넘어갔다.
2월 22-23일 동안 발크 전투단은 결정적인 공격에 나서서, 북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스테파노프카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부터 도시로 진입해 들어갔다. 이 것은 소련 제 3 전차군단의 퇴로를 차단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다음날 이들을 뒤따라서, 비킹이 서쪽과 서남쪽에서 공격해 들어가고, 제 7 기갑사단은 남쪽으로부터 스테파노프카로 통하는 가도상에서 진격해 들어갔다. 소련군 포로의 진술에 따르자면 그곳에는 제 18 전차군단, 차량화 저격 여단, 고사포병, 스키병 과 제 57 저격 여단이 있었다. 제 11 기갑사단의 전투단은 공격을 지속했고, 북으로 밀고 들어가 바르벤코보에 도달했고, 그 사이 나머지 2개 사단은 소련군을 포위해 마을의 외곽으로부터 조여들어갔다. 수시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비킹사단은 남서방향으로부터 마을 중심부로 진입해 들어갔지만, 소련 패잔병들은 격렬한 저항을 계속했다. 오후 늦게 제 7 기갑사단이 소련 제 3 근위 전차 군단의 반격을 격퇴시켰다. 이들은 포위망을 뚫고 포위된 병력과 합세하려던 자들이었다.
2월 24일 내내 스테파노프카 일대에서는 전투가 지속되었다. 비킹과 제 7 기갑사단은 천천히 마을 중심부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집집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제 11 기갑사단은 도시를 완전히 우회하여, 바르벤코보로 직행했다. 도시의 남쪽 능선에 막 도착할 무렵 발크는 소련군 전차들을 발견하고, 기습적으로 공격에 들어갔다. 독일군의 현란한 전차 기동에 소련전차들은 대열에서 분리되면서, 격파되었다. 곧 재편성 연후에 바르벤코보로의 진격이 속개되었다. 발크는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소련군이 사태를 파악하기 이전에 도시로 진입하고자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경계태세에 들어갔고, 참호를 잘 준비하고 있었고, 늘 그래왔듯 바르벤코보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고 있었다. 소련군에 대한 기습이 실패하자, 제 11 기갑사단은 다음날 아침에 공격을 재개하기로 하고, 병력을 일선에서 뒤로 물렸다.
이당시 소련군의 무선통신은 보안에 매우 취약했고, 제 1기갑군은 종종 소련군 무선을 도청하고,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 그중 상당수는 포포프 사령부에서 직접 송출되는 무선이었다. 독일군은 메시지들을 파악하고 최대한 귀중한 정보를 습득했다. 포포프는 자신의 잔여 전력을 바르벤코보에 집중시킬 것이 명확해졌고, 그의 1차적인 임무는 제 40 기갑군단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이 될 터였다. 바투틴으로부터 하달된 명령도 독일군에게 간파당했다. 독일군은 소련 남서 전선군이 모든 가용한 병력을 바르벤코보-슬라비얀스크-이줌 일대로 집결시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라인을 지켜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증원병력이 동쪽으로부터 접근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병력 이동과 배치의 목적은 소련군 수뇌부가 하르코프 -슬라비얀스크 일대의 공격작전은 이미 불가능 한 것으로 보고, 제 1 근위군과 제 6군의 후퇴로를 열어놓는데 있었음도 파악하게 되었다.
스테파노프카 일대의 소련군 최후의 저항은 제 7 기갑사단의 기갑척탄병에 의해 2월 24일 심야에 종식되었다. 비킹은 재편성 이후에 소탕전은 국방군 사단에 맡기고 사마라 강변의 계곡방향으로 이동했다. SS 사단의 선도대는 페트로파블로프카에서 사마라 강변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제 17 기갑사단 병력과 조우했다. 비킹과 협력하여, 제 17 기갑사단은 소련군을 북으로 구축했고, 사마라 강을 건너 후퇴할 것을 강요해다. 포포프 집단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음은 물론, 잔여 병력도 전면 수세로 내몰렸다.
제 40기갑군단은 성공적으로 지난 21일간의 치열한 격전을 마무리 지었고, 제 1 기갑군 서측면에서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적 5개 전차군단의 공격을 받아쳐냈고,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반격에 참가했다. 지난 3주간 소련군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시켰다. 자체 추산으로 251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하고, 17대의 무장 차량, 73문의 야포, 135문의 대전차포를 격파하고, 475대의 기타 차량을 파괴하거나, 노획했다. 소련군의 인명손실은 3000명의 전사자와 569명의 포로였다. SS 기갑군단과 제 48 기갑군단이 북진하여 하르코프 탈환을 위해 재편성 되는 동안, 제 40 기갑군단은 소련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예비대를 투입하기 이전에 이줌과 북도네츠 강변까지 돌파할 목표를 품게 되었다. 위협적이던 포포프의 전력을 소탕하면서 하우써의 SS 기갑군단은 자신들의 목표를 판주틴과 로조바야 진격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제 4 기갑군과 제 1 기갑군의 기갑사단들은 공격시에 어깨를 맞대듯 평행하게 나아갔고, 서쪽으로 파블로 그라드, 동쪽으로 슬라비얀스크로 전선을 확대해 나갔다. 하우써의 SS 사단들이 선봉에 나서, 북진을 준비하며, 하르코프로 방향을 전환하면, 일련의 공격이 가해지면서, 이들은 대기하던 캠프의 도마위에 소련군을 올려다 놓고 내려치는 망치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2008년 7월 8일 화요일

제 3차 하르코프 공방전


9장.
SS 기갑군단이 북으로 방향전환하다.
켐프 분견군이 폴타바와 크라스노그라드에서 방어전에 임하는 동안 SS 기갑군단은 시넬니로보와 파블로그라드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에 휩쓸려 있었다. 2월 23일 쿰의 연대 “Der Fuehrer "는 파블로그라드 일대에서 방어전을 지속하며,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가해지는 소련군의 공격을 격퇴해내고 있었다. 하멜 Harmel 전투단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철도선 주변에 위치한 촌락으로부터 소련군을 구축하는 전투를 지속하고 이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파블로그라드로 이르는 주 철도선은 몇 개의 지선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그중 하나는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로 향했고, 나머지는 스탈리노를 향하고 있었다. 이 지선이 제 1 기갑군으로 통하는 주보급로였다.
아침에 하멜은 지친기색없이 자신의 연대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극도로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격려하고 있었다. 연대는 수일째 휴식없이 공격작전에 임해왔었고, 모든 사람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탈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도 소련군이 일대에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공격은 지속되어야 했다. 전날 감행된 독일군 제 15 보병사단과 Das Reich 사단의 공격으로, 소련군 제 124 근위 저격 사단의 1개 연대는 시넬니코보 동방으로 이미 밀려나 있었다. 소련군은 라즈도리와 마리에프카 일대의 마을에 위치를 잡고 일대에서 발생한 소련군 낙오병을 합세시키고 있었다. 돌격포와 수투카 급강하폭격기의 지원을 받으며, 연대는 마리에프카를 공격했고, 곧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하멜의 개인적인 리더쉽은 마리에프카 공격내내 발휘되었다. 마을이 완전히 독일군 수중으로 들어왔을때 전투가 벌어진 하루종일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소련군 2개 연대 병력 대다수가 소탕되었다.
연대 수색병력들은 제 6 기갑사단과 접촉을 확고히 했다. 제 6 기갑사단은 시넬니코보 남동쪽으로부터 소련군 제 244 저격사단의 가벼운 저항을 이겨내면서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공격을 통해 파블로그라드 동쪽의 보구슬라프와 페트로파블로프카에서 사마라강을 넘어간 2개의 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이 시점에서 호트의 제 4 기갑군의 2개 기갑군단이 손을 잡았고, 보다 북으로 진격하여 소련 제 6군의 연결선을 일소하고, 뤼발코의 제 3 전차군을 향해 덮칠 준비가 완성되었다.
드네프르 강을 향해 서진해왔던 소련군 제 25 전차군단은 SS 기갑군단이 시텔니코보와 파블로그라드로 진격함에 따라 본대와 연결이 차단되어 버렸다. 바투틴은 여전히 군단에게 서진하라고 다그쳤으며, 심지어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된 뒤에도 태도의 변화가 없었다. 제 25 전차군단의 주력은 시넬니코보와 자포로제 사이에서 발이 묶여있었고, 선견대는 보다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미 보급이 달리고 있었던 형편에서 2월 23일 본대와 차단이 발생한 이후, 전혀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항공보급도 없었고, 소련군의 모든 항공보급 역량은 포위된 부대 가운데 생존가능성이 보다 높은 곳에 우선 순위가 주어져 있었다. 제 15 보병사단은 포위된 소련군을 노보모스코프스크로부터 압박해 Das Reich가 대기중인 방향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바로 동쪽에는 제 6 기갑사단이 도로를 가득메우며, 사마라에서 북쪽으로 진격방향을 잡고 있었다. 소련군의 항공지원은 완전히 결여되었고, 독일 항공기들은 무방비상태의 소련군 병력과 차량이라는 손쉬운 먹이를 발견했다. 제 25 전차군단의 정치장교는 자신의 전차여단이 ‘공중에서 가해지는 폭격에 너무 취약했다. 우리는 7대의 전차를 상실했고, 다수의 병력손실이 발생했다.’ 라고 보고했다.
결국 제 25 전차군단은 독일군 포위망을 탈출하여 제 6군의 본대와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미 연료가 고갈된 전차에서 남은 연료를 모아서, 소수의 전차와 트럭에 주입하여 간신이 운행시켰다. 결국 이렇게까지 끌어모았던 연료마저 바닥을 드러냈고, 차량들의 시동이 꺼지면서 모든 차량과 전차가 버려졌다. 소총과 기관총정도의 무장만 가진채로 생존자들은 보다 소그룹으로 분산하여 동쪽을 향해 나갔다. 이들은 이미 지나간 독일군 대열 틈새로 스며들어 사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독일군은 최대한의 속도로 북진중이었다. 전차는 연료가 떨어지면 소각처리하며 버려졌다. 야포들은 여기저기 도로를 따라 버려졌다. 연료가 떨어져 멈춰서버린 트럭에 견인된 채로 버려진 야포도 많았다.
그 사이 Der Fueher 연대는 도이치란트 대대에서 파견된 Macher 제 16대대와 일부 SS 부대를 증강받고, 파블로그라드에 포위된 소련군 저항거점과 낙오자들을 청소했다. 소탕임무가 완수되자 마을의 북쪽과 북동쪽에 적의 역습에 대비한 새로운 방어망을 형성했다. 마을에서 축출당해 사마라강을 건너 도주한, 소련군 제 35 근위저격군단의 전력이 소모된 연대들은 브자소포크와 베르프키 일대의 마을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다. 사단은 그들에게 증강될 예정이었던 제 16 근위 전차 여단소속 전차들로 강화되었다. 소련지휘부는 독일 Das Reich 사단의 진격을 막기위해 사마라 강변 일대에서 강력안 방어선을 확립할 것을 주문했다. 소련군이 사격거점을 마련코자 참호작업을 하던 중에 남쪽에서 파블로그라드를 향해오전 토텐코프 사단과 맞닥뜨리게 된다.
Das Reich가 도하 준비를 하는 동안 모토사이클 대대가 파블로그라드에서 노보 모스코프스크로 향하는 도로를 확보하라는 임무를 넘겨받았다. 이 임무는 결코 쉽지 않았다. 도로 곳곳에서 소부대에서 상당한 규모에 이르는 러시아군이 동쪽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고자 수시로 넘나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무질서한 소련군 패잔병들은 파블로그라드 서방에 위치한 교차로를 점거하거나, 마을을 점거할 때 수시로 도로를 막아버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패잔병들 중에 중대규모의 인원이 가끔 한 두 대의 전차와 움직일때는 SS 보안병력이나, 보급병력에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Das Reich 사단의 모터사이클 대대소속 중대장이었던 헤르만 부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 2월 23일, 내 중대는 노보모스콥스크와 파블로그라드를 잇는 도로상의 북쪽 마을을 소탕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중대는 수륙양용차량을 장비하고 있었다. 대략 절반 정도가 기관총이 장착되어 있었다. 우리는 1월말 키예프에서 64대의 수륙양용차량을 수령했는데, 현시점에서 45대 정도가 작전가능했다.
나는 중대의 선두에 위치해있었고, 쌍안경을 통해 마을 서쪽 끄트머리에서 일어나는 적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관찰할수 있었고, 땅에 파묻은 T-34도 확인됐다. 우리와 마을사이에는 대략 2.5Km의 거리가 있었고, 그사이는 평평한 지면에 얕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나는 중대원들에게 넓게 산개할 것을 지시했고, 공격의 제 1파로 기관총을 장비한 20대의 차량을 앞세웠고, 나머지는 2선에 정렬시켰다. 우리는 50-60Km의 속도로 차량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수륙양용차량들은 도랑과 움푹패인 지형에서 튀어 올랐고, 적과의 거리가 수백미터에 근접하면서, 최대한의 속도를 내면서 기관총 사격을 개시했다.
실질적인 전술적 효과는 전무했으나, 적에게 가한 정신적 충격은 매우 컸던것 같다. 적은 T-34 전차마저 내버려두고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도주해 버렸다. 마을 소탕전은 잠시였고, 우리의 피해는 없었다. 적이 버리고 간 상당량의 무기와 소련군의 사상자를 검토했을때, 적은 아군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전력이었음은 틀림없어 보였다.]
2월 23일 Das Reich 와 제 15 보병사단 병력이 시넬니코보일대와 파블로그라드 시내에서 소련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일 무렵, 토텐코프의 기갑연대는 페레쉬체피노 지역을 출발했고, 오토 쿰이 지휘하는 토텐코프 연대와 동행했다. 새벽 1시경에 브자소포크와 베르프키 지역을 향한 공격이 개시되었고, 이 곳은 파블로그라드 바로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소련 제 35 근위 저격 사단은 파블로그라드 북쪽으로 불과 수킬로미터 떨어진 브자소포크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베르프키 지역은 제 1 근위 전차군단에서 파견된 제 17 근위 전차 여단이 파블로그라드 정북쪽에서 확보하고 있었다. 토텐코프 연대의 임무는 이들 2개 마을의 소련군 보병을 소탕하여 북진에 나설 Das Reich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SS 소령 요아힘 슈바흐가 지휘하는 토텐코프 연대 소속 제 3대대의 행렬은 급작스런 이상고온으로 발생한 진창으로 진격이 지체되고 있었다. 얼어붙었던 도로가 일단 녹아버리자 많은 장륜차량과 궤도형 차량의 이동으로 인해 뻘밭이 되어 버렸다. 대대는 사마라 강변과 평행하게 나있는 소로에서 이동에 무진 애를 먹고 있었다. 사마라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브자소포크 지역과 베르프키 모두를 가로질렀다. 슈바흐의 종대는 진창길을 어렵사리 통과하는데 수시간이 걸렸고, 간신히 마을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의 전초에는 소수의 소련군 보병이 방어하고 있었다.
아침까지 소련군은 축출되었고, 대대는 사마라강 북변으로 드문드문 흩어진 마을을 소탕해 나갔다. 모터사이클 중대가 앞장서고, 브자소포크 일대에서 트럭과 모터사이클에 탑승한 소련군 정찰병력과 접척했고, 소탕했다. 소련군 모터사이클 종대를 섬멸한 후 독일군 수색병력은 코체레스키 일대는 소련군 보병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SS 병사들은 마을의 서방에서 산개하여, 소련군 거점들을 강습했다. 정확한 포격지원이 뒤따랐다. 8시 30분까지 가가호호에서 짧은 격전이 벌어졌고, 마을은 독일군 수중에 들어왔다. 생존한 소련병은 무리를지어 강을 넘어 남쪽으로 도주했고, 숲이 우거진 곳으로 은신했다.
11시까지 대대는 브자소포크 외곽에 도달했고, 즉시 공격에 들어갔으나, 소련군의 방어는 완강했다. 브자소포크 북쪽의 능선에 소련군은 강화된 방어거점을 마련했고, 이곳은 포격유도를 위한 관측과 주변을 감제하는 고지 역할을 했다. 마을에 주둔한 소련군도 북동쪽과 동쪽에서 증원된 병력이 합세했고, 이들은 독일군이 마을 서쪽에서 공격할 바로 그무렵에 도착했다. 마을 곳곳에서 숨겨둔 T-34가 공격에 나선 독일군에 포격을 가했다. SS 병사들은 소련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자신들은 포화앞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사마라강 남쪽에서 가해진 포격은 워낙 격렬하여,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SS 소속 자주 곡사포들이 산개 /방열되어 촌락내의 러시아군 화력 거점에 포격이 가해졌다. 그사이 우군의 포격 엄호하에 척탄병들이 각개약진하고자 사력을 다했다. 격전은 종일 벌어졌으며, 토텐코프 연대소속 제 3대대는 저녁 6시전에 소련군 제 267 저격 사단과 제 19 전차연대가 펼친 강력한 방어선인 마을 외곽까지 전전하고 있었다. 집들 사이사이로 T-34가 숨겨져 있었고, 잘 위장된 소련 보병들과 함께 강력한 화력 거점의 역할을 했다.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한발한발 움직일때마다 희생을 강요했고, SS 척탄병은 치열한 격전을 뚫고, 마을의 중심부로 전진해 들어갔다. 도합 5대의 T-34가 격파되었고, 나머지 2대는 파괴되어 소련군으로부터 버려졌다. 그러나 깊은 밤이 되어서도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가가호호 수색과 격전이 반복되었고, 마을의 일부는 러시아군이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포로에게 획득한 정보에서 베르프키 역시 전차를 포함한 강력한 방어선이 설치되었음이 밝혀졌다. 토텐코프 연대의 제 3 대대가 브자소포크에서 연대의 남익으로 진격해나갈 무렵, 연대의 북익은 로조바야로 밀고 들어가고 이었다.
페레쉬체피노 남쪽의 집결지로부터 토텐코프 연대의 제 2대대는 오렐카를 향해 넓은 산개대형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이곳은 로조바야의 철도중심지 바로 인근이었다. 슐츠의 대대는 오렐카로 통하는 도로 양측으로 평행한 대형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연대의 북쪽 종대는 SS 소령 발터 베스트만이 지휘하는 사단 수색 대대가 이끌었다. 베스트만의 대대는 속히 전방으로 나아갔고, 이들은 슐츠의 북쪽지역의 체르노글라소프카 일대의 러시아군의 공격을 차단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곳에서 사단의 작전과 보급은 독일군 라인을 돌파하려는 소련군의 습격으로 방해받았다. 2cm 기관포를 장착한 SPW를 장비한 척후대는 오렐카 남서방에서 소련군 패잔병사이로 습격해 들어갔고, 소련군 대열을 철저히 분쇄했다. 수대의 소련군 경전차를 비롯해 다수의 포로와 다양한 야포 및 여러 중화기들이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헬무스 베커의 연대는 토텐코프 기갑척탄병 연대 소속 퀸의 제 3대대를 증강받아 아침 6시경 크라즈노 그라드를 출발했고, 남쪽으로 이동하였고, 동시에 본대는 페레쉬체피노를 향해 앞질러 나아갔다. 오후 2시까지 행군대형은 페레쉬체피노를 관통하여 오렐강안으로 통하는 도로에 도달한 후로 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종대는 막힘없이 진격을 계속하여 여러 마을을 거침없이 통과하여 오렐강안을 불과 수킬로미터 남겨둔 거리에서 정지했다. 그 사이 적의 저항은 미미했다.
적과의 교전없이 진격했지만, 그날이 저물때까지 토텐코프는 아직도 파블로그라드의 Das Reich와 연결되지 못했다. 아이케의 북쪽은 안전하고, 별다른 적의 압력이 없었지만, 토텐코프 연대는 브자소프카 서방에 지체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사단은 적과의 교전으로 인한 전차손실은 없었다. 그러나, 야간동안의 크라즈노그라드로부터의 행군에서 많은수의 차량들이 도로주변으로 분산되어 버렸다. SS 기갑군단의 전투 일지에는 기갑연대는 18대의 4호전차, 62대의 3호 전차 와 더불어 9대의 티거 전차가 2월 23일 작전 가능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티거들은 견고한 교량이 없는 거친 도로망에서 이동에 심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베커의 SS 토텐코프 제 3 기갑척탄병 연대는 2월 23일의 시점에서 군단 북익의 진격을 견고히 엄호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렐카와 크라즈노그라드 사이의 오렐 강안 양쪽을 지켜내고 있었다. 익일의 토텐코프 연대의 목표는 사마라 강변의 북안을 따라 위치한 마을에서 러시아군을 소탕하고, 파블로그라드 북쪽에서 재결집한 다음 브자소포크와 베르프키 일대에서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러시아군이 마을에서 축출되면, 이들 양 사단은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다음 목표지를 향해 철도선을 따라 공격해들어갈 작정이었다. 그곳이 바로 로조바야 였다. 그날 내내 Das Reich 사단은 마을 외곽에서 소련군의 전차와 보병돌격을 감당해내고 있었다. 오후 늦게 15대에서 20대 가량의 T-34와 소련군 보병이 돌격을 개시하여, 방어선 외곽이 관통당했고, 삽시간에 마을의 북서쪽에서 치열한 혼전이 벌어졌다. 소련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며, 마을의 중심부를 향해 가도상에서 진격하자, 잠시나마 위기상황이 연출되었다. 하인츠 마허와 그의 중대는 당시 3명의 부사관과 38명의 척후병으로까지 전력이 감소되어 있었지만, 상황을 되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전투소음으로 위기상황을 알아차린 마허는 척후중대를 이끌고, 시가전이 벌어지는 곳으로 신속이 이동해 들어갔다. 기관총 사격과 전차 엔진의 기계음은 멀리서도 들을수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또다른 소련군 전차들이 마을로 진입해 들어왔고, 조심스럽게 전진하고 있었다. T-34에 분승한 소련군 보병들은 마치 유령처럼 자갈이 널린 길바닥으로 하차했다. 이들은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했었다. 독일 척탄병들은 전투소음이 들리는 곳으로 앞으로 나아갔고, 소련군과 충돌하면서, 어지러운 총격전이 벌어졌다. 수류탄이 작렬하는 화염속에서 자동화기의 섬광이 분출되었고, 전차 소리는 멀리서도 들렸다. 전차의 궤도소리는 점차 뚜렷해졌고, 이제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좁은 통로를 따라 포복했고, 조명은 폭발과 총기 사격으로 발생하는 섬광정도였지만, 마허의 병력들은 2대의 T-34가 88mm 대전차포의 지근거리에 정지해 있음을 알수 있어다. 독일군 포조작원들은 어둠속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소련군 전차에 놀라서 포를 버리고 이탈했다. 마허는 바로 이웃 대대 지휘부에 전령을 보내 상황을 설명한 후 2개 전차 파괴조를 구성했고, 자신이 그중에 한 조를 맡았다. 그들이 전차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 귀를 찢는 소음이 울렸다.
마허가 이끄는 대전차팀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동안, 나머지 일부 병력은 측면에서 소련군 보병의 접근을 차단하는 엄호를 했다. 어둠을 방패삼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동안 마을 곳곳에서는 폭발이 일어났고, 번쩍이는 섬광과 그 섬광이 순간 만들어내는 가옥의 기나긴 그림자가 생겼다 없어졌다를 반복했다. 중사 한명이 전차에서 불과 10미터 떨어진 곳까지 포복해 들어갔지만, 전차 주변에 소련군 보병들이 깔려 있음을 확인하고, 더 이상의 전진은 불가능했다. 소련군 전차로의 접근이 불가능해지자, 앞서 나갔던 병사들은 버려진 8.8cm 포를 떠올렸고, 포대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포 조작법을 몰랐고, 소련 전차는 불과 100m 떨어져 있었다. 4대의 T-34, 1대의 KV-1, 7대의 크리스티 경전차가 보일때 2명의 병사가 8.8cm 포에 도착했다. 밤이 지날 무렵 8.8cm 포 요원인 한명의 병장이 포로 달려와 익숙치 않은 무기를 다루려는 2명의 SS 병사를 도왔다. 포조작원의 지도 아래 8.8cm 포는 다시 장전되어 불을 뿜었다. 포탄이 T-34에 작렬했고, 전차는 폭발을 일으키며 멈춰섰다. 예기치 못한 위협에 소련군 병사들은 8.8cm 포에 사격을 가하지 않고, 전차를 경계하는 위치로 움직였다. T-34는 서둘러 건물뒤로 물러났다. 이런 혼란속에서 독일병사들은 전차에 접근하여 포탑에 집속지뢰를 설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조심스럽게 포탑에 위치시킨 지뢰의 신관을 당기자 T-34는 포탑이 날아가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이렇게 2대의 전차를 상실한 소련군의 나머지 전차들은 어둠속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공격이 종료되자 척추중대의 1개 분대 병력은 88m 포 후미에 남아 엄호태세를 취했다. 마허의 재빠른 반응과 리더쉽으로 매우 심각할 뻔 했던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러나, 최초의 공격이 실패했지만, 소련군의 공격이 끝났던 것은 아니었다. 4시 15분쯤..10대의 전차를 앞세운 소련군 보병의 공격이 재개되었고, 방향은 도이치란트 연대의 제 16 대대 구역인 교회인근 무덤가였다. 다시 한 번 마허는 반격을 시도했고, 소련군 공격대열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용감한 마허의 부하들은 소련군에 맞서 근접전을 시도하여, 교회일대에서 내쫒아 버렸다. 묘비석이 깨지고, 흩어진 부근에 소련군은 40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물러났다. 마허는 부하는 인명손실이 없었다. 독일군이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소련군은 교회와공동묘지 사이로 병력을 빼내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방어선이 신속히 제거되어야만, 다음번 독일군 공격의 발판이 마련될 터였다.
SS 대위 하웁트만 크라그가 이끄는 돌격포 들이 총통연대 소속 중대병력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군 화력진지로 반격에 나섰다. 매우 교묘하게 소련군 진지선으로 접근하여, 크라그의 돌격포들은 7.5cm 주포를 발사하여 1대의 대전차포를 격파하고, 6개 기관총 진지를 근접사격으로 파괴했다. 이러한 효과적인 지원에 힘입어 SS 병사들은 소련군 외곽 방어선을 붕괴시켰고, 위험한 적의 거점제거는 물론, 심대한 병력 손실까지 강요했다.
지난밤의 치열한 야간전투가 끝나고 2월 24일 아침에 Das Reich 사단은 베르프키 일대의 소련군을 소탕하기로 결정했다. 토텐코프 연대는 브자소포크 일대에서 소련군에게 발이 묶어 있었으므로, 도움을 줄수 없었다. 소련군은 마을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전력이 약화된 징후는 없었다. 더구나, 아침이 되어서도 토텐코프는 전력을 집중시킬수 없었다. 바움이 지휘하는 토텐코프 연대의 제 1대대와 기갑연대는 예정보다 뒤쳐져 있었고, 늦은 아침이 되어서도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오전 7시로 예정된 공격은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미뤄저야 했다.
공격이 연기될 것이란 전갈을 받은 직후에 토텐코프 제 3 대대구역으로 보병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 전차들의 공격이 가해졌다. 이들 소련군은 제 35 저격사단의 잔여 병력으로 제 1 근위 전차군단의 잔여 차량도 동원했다. 제 1 근위 전차군단은 파블로 그라드 동쪽에서 Das Reich의 공격을 받고 본대와 차단된 상태였다. 소련군은 앞뒤가리지 않고 사마라 강변을 강행도하하며, 코체레시키 마을의 집결지로부터 남동쪽 방향에서 SS 대대를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독일군의 반응은 매우 신속했고, 소련군 공격대열의 옆구리로 반격을 감행했다. 공격적인 SS 병사들의 역습으로 소련군은 코체레시키 일대에서 구축되었고, 독일군의 인명손실은 매우 경미했다. 소련군은 68명의 포로를 남겼고,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도 발생했다.
코체레시키 일대의 소련군 반격이 실패한 후 독일군은 재 편성에 들어가 브자소포크를 다시 한번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동안 기갑연대와 바움의 기갑척탄병대대가 바실례프카에 집결했고, 이 곳은 코체레시키 10Km 서방에 위치했다. 오전 9시 30분 토텐코프 연대 제 3 대대가 브자소포크를 북쪽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갔고, 토텐코프 연대 제 2대대의 1개 중대는 남쪽으로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기갑연대는 3개 제파로 나뉘어 진격했고, 바움의 하프트랙들은 전차의 후미에 위치했다. 이들은 브자소포크 북쪽 능선에 포진한 소련군을 향해 쇄도했다. 강력한 포격의 엄호아래 SS 전차와 하프트랙은 참호선을 넘어서, 기관총 진지를 깔아뭉개며, 능선의 끝자락까지 내달렸다. 소련군은 능선 너머로 무질서한 도주행렬을 이루었고, 이들의 뒤에서 무자비하게 가해지는 기관총 사격으로 수없이 많은 전사자를 남겼다.
그런 후에 척탄병과전차는 소련군 방어선 외곽을 강습하여, 마을로 들어가는 통로를 개척했다. 제 244 저격 사단과 제 17 전차군단 병력으로 이루어진 소련군은 교묘하면서도, 격렬히 저항해왔다. 몇 대의 T-34가 가옥사이에 참호를 파고, 기관총과 박격포의 엄호를 받으며, 교묘히 위장한 상태로 독일군을 맞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로 양군모두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SS 병사들은 한치한치 소련군을 구축해 들어갔고, 첫 번째 화력 거점을 침묵시키고 나서는 하나하나 다음 거점들을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이용하여 습격해 나갔다. 수시간의 치열한 교전후에 소련군은 대부분 쫒겨나갔다. 거리 곳곳에 소련군 시신이 널렸고, 3대의 T-34가 불타올랐다. 오후 1시 35분이 브자소포크는 확실히 독일군의 수중으로 넘어왔다. 마을에 남은 최후의 소련군 거점을 소탕하는 동안 토텐코프의 전차와 바움의 대대는 브자소포크 북쪽 언덕의 잔여 소련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마을의 남동쪽에서 재집결한 직후에 슐츠가 이끄는 토텐코프 연대 제 2대대는 후퇴하는 소련군 대열을 덮쳤고, 이들을 베르프키 외곽으로 밀어붙였다. 잠시후 바움의 전투단은 사마라강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지류를 넘어서 교두보를 확보했다. 바움의 대대와 전차들은 마을의 북쪽 어귀어 다다랐다. 작은 능선을 돌아설 무렵 토텐코프의 전차들은 전방에 출현한 수대의 전차와 병력을 보고 즉시 사격에 돌입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지휘관은 “사격중지! 저들은 다스 라이히 사단 병사들이다!!” 라고 소리쳤다.
그 전차와 병력은 쿰 전투단 소속으로 이들은 전날 점령한 베르프키에서 북쪽으로 발진해 나오던 중이었다. 토텐코프 소속의 전차 한 대에서 간략한 답신이 갔다. “ 우리는 가치있는 표적에만 사격합니다.” 다행히 Das Reich 전차병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우군의 포격으로 장비와 병력의 손실이 발생했지만, 2개 SS 사단은 손을 맞잡고 합류했다.
베르프키는 총통연대가 점령했지만, 토텐코프에 아무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 우군끼리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도이치란트 연대 소속 제 2대대와 지원전차들로 감행된 최후의 공격은 정오가 막 지날 무렵 베르프키에서 감행되었다.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들이 동원되어 진격로 전방에 대해, 치명적이며, 정밀한 폭격지원을 했다. 소련군은 포위 전멸을 피하기 위해 북쪽으로부터의 독일군 공격으로부터 접촉을 회피하면서, 마을에서 물러났다.
베르프키와 브자소포크의 함락후에 하르코프 방향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철도선을 따라 가해지는 소련군의 공격으로부터 파블로그라드의 안전은 확고해 질수 있었다. 토텐코프 연대 제 2대대는 2개 사단의 기갑병력의 전진을 엄호할 목적으로 재 편성되었고, 다음번 목표는 판주티나와 오렐카였다. 그 사이 SS 모터사이클 대대는 오렐카로부터 남동으로 향한 도로를 확보했고, 소련군의 예상되는 반격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보다 북쪽으로는 헬무스 베커의 토텐코프 제 3 기갑연대가 2개 사단의 주 진격 축선의 측면 방어를 위해 오렐강안에서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2007년 4월 3일 화요일

팔목터널 증후군

중년 여성들중에 손이 저리고, 밤에 자다가 잠이 깨서 절절 매는 경우가 종종있다.
혹자들은 기가 부족하다고 하고, 혹자들은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점은, 어지간히 심한 내과적 질환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손에서 혈액순환문제는 일생동안 잘 발생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뇨환자가 발에 생긴 상처는 혈액순환관계로 큰 문제가 왕왕 발생하지만, 손의 경우는 그런 일이 매우 드물다.

대부분 이런 경우는
병원에서 수근관 증후군, 손목터널 증후군이라는 진단이 붙게 된다.
손목터널이란, 손목에서 손으로 넘어가는 부위에서 손바닥쪽에 형성된 가상의 공간을 말한다.
이곳으로 동맥과 정중신경, 그리고, 손아귀에 힘을 주는 모든 근육이 지나가게 된다.

그런데, 정중신경은 엄지,2,3,1/2 of 4th 손가락의 감각을 담당하게 된다.
문제는 갑작스럽게 손목의 일이 많아지면, 손가락을 움직여주는 근육사이에서 정중신경이 치여버리게 되어, 신경에 뒷탈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병리학적으로는 수근관의 천장에 해당하는 횡수근 인대가 두꺼워지는 것이 원인이다.

그런데 상당한 환자에서 손의 작업량이 증가하면서, 증세가 악화되는 걸 볼수 있다.
진단은 손이 저리고, 야간에 통증이 심하면, 누구나 내릴 수 있다.
과학적 진단으로는 NCS*(신경전도검사) 에서 정중신경의 신경전도 속도를 검사하게 된다.
임상적으로는 엄지와 새끼 손가락을 만나게 해서, 엄지 아래에 볼록해 지는 무지구가 정중신경의 눌림현상으로 근육이 위축될 경우 반드시 수술을 하게 된다.

치료는 ?
1. 물리치료와 약물의 조합..
갑작스럽게 운동량이 증가된 경우, 일시적인 경우나 급성의 경우 효과를 볼 수 있다.

2. 뼈주사(?), 스테로이드 국소 주입 요법

요즘 뼈주사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떠는 분들이 많으시다.
그러나, 뼈주사 스테로이드는 강력한 소염제로서, 국소부위의 혈류량을 매우 감소시킨다. 그래서,어지간한 통증에서 국소주입을 하면, 대부분 드라마틱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수근관 증후군에서도 1-2회 사용해 볼수 있다.
그러나, 이경후 효과가 없다면, 수술을 고려 해야 한다.

3. 수술..

수술에는 전통적인 절개법과 최근 각광받는 내시경적 최소 절개술이 있다. 양쪽 모두 장단점이 있다.
내시경은 워낙 상처부위가 작고,재활이 빠르지만, 수술시야가 좁아 숙련된 의사가 아니면 시도되기 어렵다는 점이고, 해부학적으로 이상이 있는 환자라면,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 절개법으로 40명정도 치료해본적 있다.
그런데...
엄지손가락의 근육이 말라들어간 환자의 경우에는...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다...

P.S ) 이 글을 읽으신후, 블로거 여러분들께서도, 그저 중년의 팔다리 저림현상에 혈액순환이라는 막연한 자가진단을 지양해주시길 바란다.

향후, 본 블로그를 방문하는 분들중에,
정형외과와 비뇨기과에 국한해서, 질문을 남겨주신다면, 지식과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답변을 해드릴 것을 약속한다.

2007년 3월 30일 금요일

독소전 직전의 유럽 상황에 대한 소련의 시각 - B

B. Military Art during the Rout of Japanese Militarists
at the KhalKhin-Gol River (1939년 5월 28일-9월15일)

할힌-골 강 지역에 대한 일본의 공세 준비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Khasan 호수 일대의 도박이 실패로 끝난 후에 몽고 인민공화국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오랜 기간 안 호시탐탐 몽고를 노리고 있었으며, 그 이유는 몽고의 천연자원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중요성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공격적인 방침을 채택한 연후에 일본은 몽고를 소비에트령 아시아에 접근할 발판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몽고를 점령한다면, 소비에트의 바이칼 횡단 지역에 가장 가까운 통로를 확보하게 되는 셈으로서 이런 경우를 상정한다면, 극동의 소비에트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몽고에 대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야심은 그들이 만주와 내몽고를 점령한 직후(1931-33)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야심을 1935-36년 쯤 해서는 보다 강렬하게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우리 소비에트 정부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미리 내다보고, 이것은 보다 광범위한 군사적인 모험의 전주곡으로 간주하여, 우호국 몽골을 도와 일본의 침략을 격퇴하기로 결정했다. 1936년 3월에 우리 소비에트와 몽골 인민공화국 사이에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은 전력을 몽골 인민공화국에 전개시켰다. 제 57 특수 군단 - 제 36 차량화 저격 사단 - 제 11 전차 여단 - 제 7, 8, 9 차량화 화력 여단 (Armor brigades) - 제 6 기병 여단 - 혼성 항공 여단( 전투기 연대와 폭격기 연대의 혼성) - 82대의 항공기 ( 29 SBs, 15 R-5s, 24 I-16s, 14 I-15s) 지휘는 사단장을 역임했던 M.V Feklenko 가 군단전체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상황은 1939년 봄에 이르러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서방 제국들과 팟쇼 독일의 뮌헨에서의 야합이 이루어질 무렵 일본도 영향을 받으면서, 보다 과감한 행동들로 나타났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영미의 지원과 팟쇼 독일과의 동맹관계 속에서 아시아에서의 신질서를 만들겠다는 야욕에 불탔다. 그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세적 전쟁 전략에 따른 일선의 안정을 틈타서 새로운 도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할힌 골 강변 일대를 중심으로 우리 소비에트의 우호국인 몽골에 대한 선전포고 없는 형태의 전쟁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일본 호전주의자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 소비에트의 힘을 평가하고, 차후 우리 소비에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 대한 예비 테스트의 성격을 띤 것이다. 일본인들의 몽골에 대한 공격은 우리 소비에트에 대한 팟쇼 독일의 침략을 부추기는 도화선의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1939년이 시작되면서 몽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략 3개월 반 동안 그들은 30여 차례나 국경을 침범했다. 일본인들은 몽골 영토 내에서 밀고자의 조직을 확장하였고, 몽골과의 국경을 무시하는 거짓된 구획을 정한 지도를 만들어 냈다.

우리 소비에트는 우호국 몽골의 위기를 파악하고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모험주의와 긴장형성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39년이 시작되면서, 우리 소비에트는 1차 인민 대표 회의 3차 회기에서 소비에트 정부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일본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다. ‘우리는 몽골 인민 공화국의 국경을 수호할 것이다. 그것은 몽골과의 상화 원조조약에 근거한 군사동맹에 바탕한 것으로 우리 소비에트의 국경을 수호한다는 의지로 확고하게 선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이런 경고를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들은 1939년 5월부터 몽골 영토를 침범하기 시작했고, 초반의 이들의 행동은 동만주 일대의 관동군 주력이 우수리 강,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강 일대를 침범, Primorskii 일대를 기습점령하는 동안 몽골- 소비에트 지휘부의 주의를 돌리려는 양동작전의 소규모 전력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소비에트는 이러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불온한 의도를 간파하고, 미리 예지하고, 사사려깊게 내다본 결과 이들의 시도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우리 소비에트는 Khasan 사태 이후에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 하고자 극동지역에서의 군정을 중단하고, 2개 독립 야전군과 1개 북방 야전군을 인민 방위 평의회소속으로 주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곧 일본은 국경도발을 일삼고, 바다에서 소비에트 선박을 나포하는 등의 적대적 행위를 일삼아 우리 소비에트는 극동지역에 대한 방위력을 강화시키는 추가적인 조치에 나서게 되었다.

1939년 상반기 동안 우리 소비에트는 병력을 증강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대략 345000명의 병력으로 증강됐고, 이것은 원래 5개년 계획에서 구상된 57000명을 배치하는 계획을 대신한 것이다. 이들중 1/3은 극동으로 배치되었고, 그중 10500명은 트랜스 바이칼 군구로 배치되었으며, 12900명은 태평양 함대로 3000명은 몽골로 파견되어 특수 군단에 편입되었다. 할힌 골 강변 일대에서의 교전의 시작 ( 1939년 5월 28일-7월 25일) 동만주에서의 전략적 우위의 달성에 실패한 일본 관동군은 몽골로 목표를 바꾸기 시작했다.

5월의 마지막과 6울 초에 그들은 할힌-골 일대에서 적극적인 항공활동을 펼쳤으며,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항공 우위를 달성하려고 고집스런 시도를 반복했다. 이 당시 지상에서도 일본군과 몽골군 사이에 교전이 국경 초소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일본군은 제 2기 노몬한 사변이라는 이름하에 작전을 꾸미고 있었다. 상당한 전력이 몽골 국경에 배치되었고, 대략 38000명의 장병과 310문의 야포, 135대의 전차와 10대의 무장차량 225대의 항공기가 준비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을 기습하여, 포위/격파한 다음, 할힌 -골 강변을 도하하여 서안에 차후의 작전 거점을 위한 교두보를 형성할 예정이었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보병 3:1, 기병 4.5:1)를 확보한 다음 아군을 일시에 휩쓸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자신감에 넘친 나머지 외국 참관인을 초청하였으며, 그들은 대략 팟쇼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온 이들로, 이들에게 전투를 참관하고, 작전의 성과를 목격시키려 했다. 7월 2일 대략 1개 사단을 상회하는 전력의 일본군이 공세에 나섰다. 7월 3일 저녁까지 그들은 할힌 골 강변을 강행도하했다. 이에 맞서 소비에트-몽골 연합 지휘부는 가용한 모든 전력을 전투에 투입했다. 여기에는 전차 여단과 차량화 화력 여단이 투입되었고, 1개의 차량화 저격 여단과 1개 몽골 기병사단도 투입됐다. 3일간의 대규모 교전이 Baiian-Tsagan 산 일대에서 벌어졌고 대략 5000대의 전차와 무장차량, 300문 이상의 야포 수백 대의 항공기가 양편에서 동원되어 격돌했다.

일본침략자들의 충격군은 할힌 골 강변으로 되몰렸으며, 이들은 항공지원속에 계속되는 소비에트의 반격에 계속해서 쫒겨갔다. 전투에서 일본군은 모든 전차를 상실했고, 상당한 양의 야포를 잃었으며, 45대의 항공기가 격추되었고, 약 1만 명의 인명손실을 냈다. 그러나, 7월 8일 일본군은 휴식과 재편성 없이 다시 한번 대규모로 공격을 재개했다. 4일간의 혈전 끝에 일본군은 5500명의 전사상자를 내고 철수했고, 할힌-골 강변의 동안으로 도주하여, 수세에 몰렸다.

소비에트 장병과 지휘관 몽골 병사는 헌신적으로 일본 침략자들의 공격을 격퇴했고, 용감성과 영웅적인 투쟁으로 기적을 만들어냈다. A.A. Martynov 중위는 행군중에 그의 전차에서 5문의 일본군 야포를 격파했고, 그의 전차가 피격되어 전차포가 사용불능이 되자, 기관총으로 수개의 일본군 화력거점을 무력화시켰다.

정치장교 D.P. Viktorov 는 자신의 전투 차량에서 일본군 야포 10문을 격파했으며, 적의 전차에 피격되고 일본군에게 포위되어서도 숨을 거둘 때까지 사격을 계속했다. G.M. Mikhailov 소령은 전차 지휘관으로서 일본군의 후방 깊숙이 돌파를 이루어냈다. 그는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지휘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그의 부대를 훌륭히 지도했다.

몽골 영토내에서 2개월간의 혈전 속에 일본군은 도저히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없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상황이 유리해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1939년 8월의 대공세라는 이름 하에 아군에게 복수를 가해오려고 있다. 이 시기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시기로서, 일본 전쟁지도부는 유럽의 상황을 고려했음이 분명하다, 소련군도 유럽의 상황에 발이 묶인 입장이므로, 일본군은 대규모 공세를 편다면, 유럽과 아시아의 양면전쟁 속에서 소련군은 희망 없는 입장에서 항복하리라는 말도 안 되는 몽상을 했다.

약 한달간에 걸쳐 일본군은 새로운 부대를 증강해왔고, 제 6 야전군이라는 부대를 편성했다. 이 전력은 Ogisu Rippo 대장이 지휘하는 부대로 이전에 동원된 일본군의 전력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소비에트 몽골 연합군의 8월의 공세(1939년 8월 20일-30일) 현재까지 드러난 상황 속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그간 몽골 인민 공화국에 침략자들을 격퇴하고, 극동에서의 대규모 교전을 막아왔던 상황보다 보다 큰 개입을 하기로 결정했다. 8월의 중순까지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의 전력은 57000명의 병력에, 463대의 전차, 679문의 야포, 2390문의 기관총, 492대의 항공기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제 1 야전군은 군사 평의회 직속으로 G.K 주코프를 군단 지휘관으로, M.S Nikliuev 가 총 정치 책임장교를 맡고, 참모장으로는 여단장 M.A Bogdanov가 책임을 맡아, 1936년 6월 15일 발동된 주요 군사 평의회의 결의에 의거 가용한 수단과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몽골 측에서는 Choibolsan 원수가 몽골군의 지휘권을 행사했다.

극동소비에트 군과 몽골 국가 혁명군은 전선군 지휘 하에 전폭적으로 협력한 가운데, G.M Shtern 이 지휘를 맡고, 사단 정치 장교 N.I.Biriuk 와 M.A Kuznetsov가 참모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트랜스 바이칼 전선군은 몽골에서의 전투 수행에 필요한 모든 물자의 수송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의 임무는 일선에서 일본군의 움직임을 제어하여 고착시키고, 적의 양측면으로 2개의 주요 축선을 따라 강력한 반공을 개시하여, Nomon-Khan-Burd-Obo를 돌파하여, 국경지대인 Khalkhin-Gol 강변일대에서 적을 포위 격멸하는 내용이었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3개 전투 그룹이 편성되었다. 남쪽 그룹은 2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과 1개 차량화 화력 여단으로 구성되었고, M.I Potapov 대령이 지휘를 맡았고, 이들이 주공이었다. 북쪽에는 I.V Shevnikov 대량이 지휘를 맡아 2번째 공격축선을 이룰 예정이었고, 중앙부는 적의 주요 전력을 전선 전면부에 고착 기만하는 임무를 맡았다. 작전의 준비는 최대한 엄격한 보안 속에 이루어졌고, 적에 대한 Maskivoka 와 기만 전술이 최대한 사용되었다. 군단 지휘관 N.N Voronov 와 여단 지휘관 F.G Korzin 은 포병의 지휘를 관장했다.

모든 포병은 보병에 대한 대지 지원과 대 전차 지원으로 나누었고, 장사정 후방목표를 위한 임무도 별도 편성했다. 남부 충격 그룹에는 72문의 야포가 북부 그룹에는 36문 중앙부는 100문의 야포가 배당되었다. 포병과 보병은 최대한 협력체제를 이루도록 배려했다. 우리 소비에트는 공세에 앞서 항공우위를 점하기 위한 신중한 노력을 병행했다. 일본군이 5월과 6월에 누렸던 일시적인 우세는 급속히 소멸됐다. 이것은 특히 우리 소비에트의 최신예 항공기 I-16(세계 최초로 로켓병기를 사용했다.)과 I-153(Chaikas)기 등이 배치되고, 항공 군단장 V shushkevich가 지휘하는 스페인 내전과 중국 영공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우수한 조종사들이 배치되면서 항공우위는 더욱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정교한 통신망과 지휘체계를 구성하려는 세심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일선 부대에 대한 통합 지휘본부는 Khamar-Dava 산의 서방에 위치한 Khalkhin-Gol 강변에 설치되었다. 제 2선 참모진은 20킬로미터 후방에 위치했고, 후방 제대는 대략 120킬로미터 후방에 대기했다. 공병은 자연장애물과 작전 지형의 애로를 극복하기 위한 공사에 착수했다. 그들은 28개의 교량을 건설했고, 57개의 우물을 설치했고, 63개의 야전 비행장을 건설했고, 150킬로미터의 일선 도로를 개수했다. 후방의 지원업무부서도 다가올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의 공세를 원활하게 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수송업무는 트랜스 바이칼 군구에서 3275대의 트럭을 사용했고, 제 1 야전군에서도 2580대를 동원해 중간 기착지 없이 끊임없이 수송대열을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6-7회 공격분량의 포탄(항공부대의 경우 8-10회 분량) 5-6 POL의 연료, 16-18일분의 식량이 축적되어다.

준비기간동안 공격군의 평의회에서는 당-군대간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의 정신 전력강화에 역점을 두었다. 공격 개시시점까지 소비에트 군에서 1204명이 자발적으로 당에 입당했고, 1809명이 콤소몰에 가입했다. 모든 장병의 11퍼센트가 당원으로 구성되었다. 공세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일반 병사들을 독려하고, 모범이 되는 전위 부대도 소단위 별로 조직되었다.

공세는 8월 20일 일요일에 개시되었다. 엄격하게 작전 계획에 따른 것으로 오전 5시 45분에 153대의 폭격기가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일본군의 일선 진지에 맹렬한 폭격을 퍼부었고, 곧 야포 진지와 후방 병참 진지와 예비 진지로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6시 15분에는 포병의 준비사격이 2시간 반동안 지속되었다. 오전 9시에는 최종 15분간의 항공-포격이 이루어진 직후에 야전 이동 방송반에서 울려 퍼지는 인터내셔날 가의 장엄한 음향 속에 소비에트-몽골 군이 전차와 기병을 앞세우고 진격에 나섰다. 적들은 아군의 강력한 반격에 겁을 집어먹고 1시간 30분 동안이나 대응포격이나 단 1대의 항공 반격도 가해오지 못했다.

그날이 저물 무렵 아군의 공격은 대성공으로 판명났다. 특히 북부 공격 집단과 남부 공격 집단의 외곽에서 소비에트-몽골 기병은 일본군-Bargut 기병을 압도하며, 적 전선을 돌파 예정된 장소에 도달했다. 전선의 중앙부에서도 우리 연합군은 적 전선을 강하게 압박했다. 최종적인 성공은 Hill Palets(Fui)지역에서 달성되었다. 이곳은 북부 집단의 공격 시에 적들이 강하게 저항해온 곳으로 우리 소비에트는 I.A Sudak 소령이 제 601 저격 연대의 선두에서서 가장 치열한 상황에서 영웅적인 죽음으로서 부하들을 격려한 바로 그 지점이었다.

공세 첫날의 성과를 분석하고서, 제 1 야전군 지휘관과 군사 평의회는 모든 예비 병력을 북부 공격 축선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8월 21일 야간에 좌익으로 전력이 이동했고, 이들은 I.P Alekseenko 대령의 기동집단으로 배속되었다. 이들은 8월 23일까지 영웅적인 전투를 감행하여 Nomon-Khan-Burd-Obo에 도달했다. 그 다음날 제 9 차량화 장갑차 여단은 남쪽 그룹의 제 8 차량화 여단의 치열한 교전지로 돌입해 들어갔다.

이들은 남북 연합으로 일본군을 포위하고, 일본군이 국경너머로 도주할 통로를 차단해 버렸다. 8월 24일 일본군은 완패에서 일부 부대나마 구하려는 의도에서 예비대를 이동시켜 동쪽에서 공격하여,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다. 그러나 적들의 이러한 시도는 국경 부근에서 제 57 저격 사단 부대들의 강력한 반격에 가로막혔다. 제 127 저격 여단 지휘관 N.F Grhukin 소령은 치열한 근접전 속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분전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부대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영웅적인 투쟁과 부상에 대하여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고, 사후에 그에게 소연방 영웅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다.

제 80 저격 여단 지휘관 N. 자카로프 대령은 전투를 정교하게 지휘했고, 자신의 구역으로 감행된 일본군의 모든 공격을 격퇴했다. 포위망의 외선을 기병, 차량화 저격 부대, 전차, 항공부대로서 강화함과 동시에 포위된 일본군과 대치중인 포위망의 내선에서는 일선 저격 부대가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Zelenaia, Peschanaia, Palets(Fui), Remizov 외에 기타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를 확보한 라인으로 저항거점을 형성했다. 일본군주력을 포위하는 데는 불과 3일이 걸렸지만, 이들을 소탕하는 데는 1주일 이상 걸렸다.

소탕전에는 고도의 보/전 협동작전이 요구되었다. 또 경사면 너머 웅거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 직사 포격 외에도 정밀한 박격포 공격이 요구되었다. 항공 활동은 적의 예비 병력의 증원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적이 항공편으로 증원되는 수단을 차단했다. 8월 31일 적의 최종 저항거점이 일소되었다. 대규모의 충실한 장비를 갖춘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분쇄된 것이다.

Khalin-Gol 강변의 전투는 소비에트와 몽골 인민 공화군 간의 긴밀한 상호협조 하에 이루어진 작전으로서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한다는 공동목표 속에서 복잡다단한 작전/환경 속에서 이루어낸 성공이었고, 대규모 협동작전 능력을 보여준 쾌거였다. 반 사막화된 지형이라는 복잡한 전장환경 속에서 전투능력의 집결은 단기간 외에는 지속하기 어려웠고, 여기에 독립적으로 야전군단위의 거대한 작전을 감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매우 컸으나, 74킬로미터의 전선 전면과 20킬로미터의 종심을 11일 사이에 돌파한 이 군사적인 성공은 그때까지의 전사 상에 위대한 업적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작전의 형태와 환경 및 여타 지속기간 등은 정치적인 고려 속에 제한되었다. 그것은 일본군을 단지 몽골 영토 내에서 요격하는데 국한하였을 뿐이며, 보다 광범위한 전면전으로의 비화는 자제했다.

몽골에서 일본군은 60000명의 전사상자를 냈으며, 상당수의 포로가 발생했고, 660대의 항공기를 격추당했으며, 상당한 량의 군수물자를 상실했다.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은 소총 12000정을 노획하고, 200문의 야포를 노획했으며, 400문의 기관총도 획득했고, 100대의 차량을 얻었다. 이것은 일본군이 2년 반 동안 중국에서 잃은 손실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Khalkhin-Gol 강변의 포위전은 관동군에게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혔고, 지휘부 전원이 면직 조치되었다.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의 기대치 못한 영웅적인 행동과 과감하고, 수준 높은 전투 활동은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17121명의 소비에트 전사가 영웅의 칭호를 받았고, 그중 70명은 소연방 영웅이 되었다. 그중에 3명의 지휘관 V. Smushkevich, Kravchenko. Gritsevich 는 두 번이나 소연방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24개 단위 부대가 레닌 칭호와 적기 칭호를 받는 부대 표창을 받았다. 많은 몽골 장교와 사병들이 영웅적인 투쟁을 했다. L. Dandor, L. Galebator, Dugarzhav, Khaiankhiarvaa 가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소비에트 장병들의 깊은 애국심과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날리즘은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시점에서 공산당과 콤소몰 당원이 됨으로서 나타났다. 10230명의 조직에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8월 31일 포위된 일본군이 소탕되고, 몽골지역이 깨끗이 청소되었고, 소비에트-몽골 연합군은 수세로 전환하여 국경경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항공전은 상호간에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특히 8월 31일 대규모의 항공전이 벌어졌다. 아군은 126대의 항공기가 참전하여 일본군의 96대의 내습을 완벽하게 물리쳤다. 일본군은 22대나 격추당했다. 9월에도 하늘에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그칠 줄 몰랐다. 일본군은 하늘에서만은 우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9월 15일 가장 대규모의 항공전이 벌어졌다.

일본군 사령관은 가용한 모든 항공기를 집결시켜, 몽골 지역으로 내습했다. 적은 127대를 동원했고, 아군은 207대를 동원했다. 다시 한번 일본군은 20대의 항공기를 상실했고, 결국 몽골의 하늘을 포기했다. 적은 15일 동안 70대의 항공기를 상실한 것이다. 일본군이 전투에서 대패한 것이 명확해 지자 일본정부는 소비에트와 몽골에 강화를 요청하고, 적대 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청해왔다.

1939년 9월 16일 몽골 인민공화국의 동부 국경에 평화가 찾아왔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몽골 동부 국경에서 박살난 것과 동시에 이 사건은 전세계에 일대 반향을 몰고 왔다. 우리 소비에트의 위대한 힘을 전세계가 인지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극동에서 반 제국주의 투쟁을 보다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극동에서도 아시아판 뮌헨 체제를 획책하려는 일본의 의도는 여지없이 박살났고, 몽골과 소비에트를 자신들에게 흡수하려는 시도도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 참패는 일본의 외교 정책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대 조국 전쟁 기간내내 팟쇼 독일과의 협력에 소극적이었고, 자신들의 전술과 개념을 기초부터 재점검했던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동시대의 역사학자 D. Mcsherry는 다음과 같이 찬사했다. ‘ Khasan과 Khalkhin Gol 에서의 소비에트의 대승은 일본에 차후로도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으로 하여금 소비에트와의 전면전은 자신들에게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영국의 전사 연구가 M. Mackintosh 도 다음과 같이 찬사했다. ‘Khalkhin-Gol 일대에서의 소비에트의 위대한 승리는 팟쇼 독일이 감행한 1941년 6월의 공격에도 일본 정부가 협조하지 않은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Khalkhin-Gol 일대에서 1939년 8월에 감행된 소비에트-몽골의 공세는 새로운 전장환경 속에, 또 새로운 종심 전투에 대한 시각에서 공세를 준비하고, 진행한 우리의 군사적인 견해가 옳았음을 확고하게 증명해준 것이었다. 전차/ 장갑차/ 포병/ 항공의 제반 병과들의 협동 작전 같은 현재전의 개념이 적용되었다. 8월의 이러한 대첩은 각 병과들의 유기적인 결합에서 얻어진 성공이었고, 우리 소비에트 군은 속도전과 종심진지를 돌파하는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여기에 대 전차 화력과의 유기적인 협조는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전차도 보다 대구경의 화포와 강력한 무장과 장갑이 필수적이었다.

여기에 근접전을 확실히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보병의 정밀한 운용이 필요했다. 제 1 야전군 집단 지휘관의 적절한 판단은 작전의 성공을 보증해 주었다. 충격집단은 적의 취약한 양측 면에서 운용되었고, 이곳은 적의 전력 중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만주군과 Bargut 기병이 방어하던 곳이었다. 주공은 좌익으로 집중되었고, 적은 주력을 집중시키지 못한 지역이었으므로, 허를 찔린 것이다. 8월의 작전은 적에 대한 정교한 전술적 작전적 측면의 제병과에 대한 운용과 역동적인 항공 전력의 운용에 따른 사막 초원지대라는 지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성과이다.

이 성공은 훗날 대 조국 전쟁에서 우리 소비에트가 이룩한 성공의 초기 모델이라고 할수 있다. 공세기간 내내 운용된 전력은 적의 강력한 저항거점이나 적의 중심 방어거점에 대한 장기적인 전투를 상정하고 짜여진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진격 속에서 적을 각개 격파해 나가면서, 적을 포위해 가두어버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세심한 병참 태세는 작전의 성공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주의 깊은 보안조치로 인해 소비에트-몽골 지휘부는 적에게 작전적 측면은 물론 전술적인 면까지 완전한 기습을 달성한 것이다. Khalkhin-Gol 강변에서의 전투는 소련군에게 주요한 전술적 자산을 안겨 주었다. 여기에 우리 소비에트 병기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렸으며, 소비에트와 몽골전사의 용감성과 영웅적인 투쟁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39년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대한 압승의 결과 Khalkhin-Gol 전투 기장이 제작되어 우리 소비에트-몽골 참전자들에게 수여되었다. 몽골 정부는 전투 전적지 주변에 기념물을 건조했다.

이것은 1954년 8월 20일에 완공되었으며, ‘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맞서 인민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고자 Khalkhin-Gol 강변에서 전사한 모든 소비에트 병사들과 몽골 전사들에게 영광을 기린다’ 는 문구가 대리석에 양국 언어로 새겨져 양 형제국간의 우의를 다짐하고 있다. 레닌 동지와 SukheLator 동지 사이에 맺어진 소비에트-몽골간의 우의는 Khalkhin-Gol 일대에서 가혹한 시련의 시기를 거쳤다. 우리 소비에트는 형제국 몽골에 대한 국제적인 과중한 의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우리가 승리를 거두자 일본제국주의자와 맞서 싸우던 중국 인민들에게 자신들의 영토를 점령한 일본군에 대한 저항의지를 고취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 글은 적고나니 유럽 상황과는 거리가 멀어 제목이 무색하군요. 너그러이 양해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007년 3월 29일 목요일

독소전 직전의 유럽 상황에 대한 소련의 시각 - A

이글은 소련 총참모부에서 연구한 내용을 D. Glnatz씨가 영역한 내용으로 금일부터 연재할 내용은 대략 4개 정도의 주제가 있습니다. 본격적인 2차 대전의 직전에 뮌헨 협정 전후의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핀란드 전역, 폴란드 전역, 일본군과의 할힌 골 전투 등을 순전히 소련의 시각에서 입맛대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얼마나 객관적일는지는 저로서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이 워낙 공산주의자들이 떠드는 통계나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가 이 글속에서 소련군과 소련에 대해 상당히 조롱하는 듯한 시각이 내포될지도 모릅니다.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라고, 전체체제 하에서의 소련의 연구가 이렇듯 비 현실적이고 제논에 물대기 식의 멋대로의 해석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cerpt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r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 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Introduction

최근에 소련 군사 연구소와 문서 보관소 들은 그간 서구에서 접할 수 없었던 내용들의 저작과 보관 문서들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복원과 러시아와 서구 연구 기관, 정부, 일반 시민간의 상호 이해에 지대한 공헌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최근 해금된 문서 중에서 상당 부분은 소련군 보로실로프 군사 참모 대학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준비되고 연구된 것이다. 그중에 흥미있는 것 중에 하나가, 소련군 총참모부에서 펴낸 'The History of War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란 제목을 가진 1977년판 통사이다. 이 문서에서 그간 공개된 소련군의 문서들이 그러하듯 심하게 왜곡되어왔던 부분들에 대해 내용을 다루면서 발췌해 놓았다. 특히 이 내용에서는 1938년 체코에서의 위기와 1939년 일본군과의 할힌 골 전투, 1939-40년 사이의 폴란드와 베사라비아 전투 및 비슷한 시기의 핀란드 전역에서의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이것이 완전히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지는 못할지라도 2차대전 직전과 대전초기의 복잡다단한 군사적 발전에 관해 하나의 이정표로서의 역할은 한다고 생각된다.

David. M. Glantz The History of War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Measure of the Soviet Government to Render Military Assistance to Czechoslovakia (1938년 8월-10월)

소비에트 연방은 고도의 활력과 정열을 내뿜고 있었으며, 극동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팟쇼들의 책동을 제어하기 위해 정력적인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서유럽에서는 예상치못한 반동적인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속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와 스페인공화국에 대한 억압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극동에서는 수세적인 입장속에서도 몽고 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원은 전혀 줄이지 않았으며, 중국 인민들의 방어투쟁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럼에도 한편으로 유럽속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의 사태에 대해 모든 사태들의 과정과 결과를 확실히 제어할수 있는 대응적인 조치를 꾸준히 시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소비에트 정부는 조약에 의거하여 예견한대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을뿐만 아니라, 외교정책으로서 보다 공고한 개입의 의무를 확고히 하였다. 여기에 소비에트와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의 참모부 사이의 보다 공고한 접촉에 중점을 두어 1938년 3월에 이미 특수 군사 사절단을 체코슬로바키아에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소연방 원수 G.I, Kulik 원수를 사절단장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총참모부와 함께 독일군의 공격시에 효과적인 방어수단에 대해 공동으로 연구하였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러한 군사 사절단의 면담을 무시하였다. 영국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런던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을 히틀러에게 양도하게끔 강요하던 바로 그시기에 우리 소비에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항공지원을 준비하고 있었고, 여타 가용한 수단들을 동원하였으며, 가장 최신의 폭격기 제조 특허권을 양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소비에트의 팟쇼들의 책동을 격파하고자 시도된 여러 유기적이며, 정열적인 조치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시각에서는 지원의 의사가 전혀 없었으므로 무의미한 것으로 보여졌지만, 우리 소비에트 정부는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인 준비를 혼자서 하고 있었다. 1938년 7월 26일에 붉은 군대의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키에프와 벨라루스 일대를 특별 군사 전구로 지정하는 결정을 채택하였으며, 사령부를 바로 체코 슬로바키아 인근에 배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소련 인민 국방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소연방 원수 K.E 보로쉴로프 원수는 이러한 결정의 완성으로서 지토미르, 비니차, 오데사, 기병 집단의 4개 대 야전군 구성을 주장했고, 이는 곧 키에프 특별전구내에서 곧바로 시행되었다. 2개 야전군 비텝스크, 보브루이스크 는 벨라루스 특별전구에 형성되었다. 이런 소비에트의 노력은 1938년 9월 1일까지 완료되었다. 각 야전군의 작전 집단은 수개의 저격 사단, 전차 여단, 포병, 공병 소부대와 기타 지원부대로 구성되었다. 기병그룹은 강력한 대규모 기동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2개 기병군단과 전차, 포병, 공병 기타 지원병과를 망라하고 있었다. 대규모 야전군 편성당시 키에프와 벨라루스 특별전구에는 인원의 보충과, 장비, 탄약, 연료 모든 전투에 필요한 완전준비태세를 갖추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동시에 이들 특별전구 병력들의 전투에 대비한 대응태세를 고양시키기 위한 여타의 노력도 병행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원할 경우 군사적으로 지원하리라는 결정은 당시 소비에트 연방이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직접적인 국경접촉이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따라서, 보다 확고한 군사적인 지원을 적시에 제공하기 위해 소비에트 정부는 프랑스에 대해 폴란드와, 루마니아, 발틱국가들에게 외교적인 압력을 가해서 팟쇼 독일의 체코 침공에 대비해 적시에 체코를 구원할 수 있도록, 소비에트 군을 이들 국가의 영토 내에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체코 국경인근의 2개의 군사 전구는 특별군사전구로 변환되었다. 동시에 소련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1938년의 여름에 보다 현실적인 지원을 할수 있도록 최선의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소비에트의 이런 노력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다. 영국정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팟쇼 독일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침략자들에게 당근정책을 계속해서 폈던 것이다. 당중앙 군사 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는 서부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련이 사건들을 예의 주시했지만, 우방국 체코슬로바키아에 가해지려는 위해에 대해서 정확히 내다보는데 실패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은 그들 자신의 불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다 정열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것은 소비에트-체코슬로바키아 군사 동맹과 체코슬로바키아 노동자와 더불어 사회주의 동맹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소련군의 임무는 이제 완전히 전투 편성에 돌입해 대기상태에 들어갔으며, 필요시에는 언제든지 체코슬로바키아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치들을 시행하기 위해서 9월 21일 인민군사위원회는 키에프 특별전구 사령부에 유선으로 교시를 내렸다. 그것은 2개 대규모 야전군을 보다 국경근처로 이동하라는 것으로 2개 대 전투 집단과 기타 소규모 운용그룹을 Volochisk, Proskurov, Kamenets-Podol나, Novograd-Volinskii, Sheptovka 일대로 포진한다는 것이다.

그중의 일대는 비니차 야전군으로 이들은 제 17 저격 군단(제 72, 제 96, 제 97 저격 사단)과 제 23, 제 26 독립 경전차 여단, 제 25 전차 군단( 제 4, 제 5 전차여단, 제 1 차량화 저격여단) 과 제 4 기병군단(제 9, 제 32, 제 34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제 2 대는 지토미르 야전군으로 이들은 제 8, 제 15 저격군단(제 7, 제 44, 제 45, 제 46, 제 60, 제 81, 제 87 저격 사단)과 제 2 기병군단(제 3, 제 5, 제 14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각 저격 사단을 전시 편제로 증강하고자, 병력충원이 이루어졌고, 각 사단당 대략 8000명의 전투병력이 배치되었고, 사단의 수송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마필의 충원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여기에 영구 강화 진지에서 철도편으로 각 사단의 집결거점으로 병력 수송이 제안되었다. 3개 대전차 포병연대와 3개 고속 폭격기 연대와 1개 중폭격기 연대가 각 전투그룹에 배치되었다. 전투기들은 항공기지에서 전방으로 이동했다. 폭격기들은 영구기지에서 작전하도록 배려되었고, 착륙시에는 일시적으로 국경지대의 비행장을 이용할수 있도록 했다. 그 다음날 아침, 키에프 특별전구 사령관은 총참모부에 당 위원회의 교시가 새벽 4시까지 모든 병사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보고했고, 벌써 병사들은 전방의 집결지로 출발했다고 알려왔다. 특별 작전 세력을 지휘통제하기 위해 Semen Timosenko 대장이 지휘하는 지휘부가 키에프에서 Proskurov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충격군과, 전구 사령부, 모스크바간의 양방향 유선통신이 가설되어 있는 곳으로 최신의 통신장비와 조작요원들이 중앙에서 Proskurov로 참모들과 함께 파견되었다. 참모본부는 야전군 항공지휘관들에게 보로네즈 일대로 재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전력을 Belaia Tserkov와 우만 일대의 키에프 특별 전구 일대로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그럼으로서 이들 항공전력은 남서 방향의 육상전력을 보다 용이하게 지원할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전구 지휘관은 이러한 사실을 듣고서 항공부대 에 대한 연료와 탄약 지원에 만전을 기하기위한 조치들을 강구하게 되었다. 2일후에 인민 국방위원회와 총참모부는 벨로루스 특별전구에 대한 추가적인 지시를 내렸고, 새롭게 편성된 칼리닌 전구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명령을 발동했다. 이들에게는 대규모 야전 부대를 국경에 인접배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2개 야전군 그룹이 전투 경보 발령후에 벨라루스 전구에 증강되었다. 비텦스크 그룹은 폴롯츠크 그룹( 제 4 저격군단 (제 5, 제 50 저겨 사단, 제 18 전차 여단) 과 레펠 그룹 ( 제 27 저격 사단, 제 24 기병사단, 제 16 전차 여단) 과 보브루이스크 그룹(제 16 저격 군단 [제 2, 제 13, 제 00 저격 사단, 제 21 전차 여단])과 제 5 기병 군단(제 4, 제 7, 제 36 기병사단) 으로 구성되었다. 비텝스크 야전군 집단은 폴롯츠크 북서방으로 일단의 전력을 집결시켰고, 2번째 전력은 Begomlia, Berezino (Lepel의 서방)에 집결시켰다. 보브루이스크 전투 집단은 민스크 요새 구역을 점령하라는 명령과 이들 교외의 거점을 확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증강된 제 67 저겨 사단은 칼리닌 전구에서 차출되어 국경으로 이동했다. 9월 24일 오전에는 모든 일선부대가 자신에게 부여된 구역으로 이동해 배치되었다. 전투기와 폭격기들은 지상전력을 엄호하고 지원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전투기들은 Sebezh, Polotsk, Minsk, Slutsk 방향으로 일선비행장에 배치되었고, 경폭격기들은 Vitebsk, Orsha 일대에 중폭격기들도 영구 공군기지에서 일선으로 이동배치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선 지상전력과 항공전력에 더해서 국경을 따라 요새화된 지역과 일선 종심구역으로 야전 공병과 비행장 건설대대가 배치되었고, 비상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이들은 서부 국경 전구에 중점적으로 배치되었고, 보병의 일선 정찰도 강화되었고, 대공 방어 체계도 개선되었다. 24시간 당직 체제가 사령부와 통신 센터를 중심으로 확립되었고, 비슷한 조치가 모스크바와 하르코프 전구에서도 시행되었다. 모두 합해 다음과 같은 전력이 전투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1개 전차 군단 30개 저격 사단 10개 기병사단 12개 항공 여단 7개 요새화 수비대 방공부대는 다음과 같다. 2개 군단, 1개 사단, 2개 여단, 6개 대공 경보 연대, 4개 대공포 여단, 15개 대공포 연대 기타 보급 집적소와 기지 및 여타 후근 부대들이었다. 1938년 9월 25일에 소비에트 인민 국방위원회는 프랑스 군사 당국자들에게 상기 조치들의 일부를 알려주었다. 그는 파리에 소비에트는 이미 체코를 돕기 위한 주요한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1. 30개 저격 사단들이 서부 국경을 따라 증강 배치되었다. 2. 10 개 기병사단들도 같이 배치되었다. 3. 기타 전차와 항공부대들도 완전 전투 대비태세에 들어간 듯 하다.

1938년 9월 28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4 대표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를 배제하고, 우리 소비에트를 따돌린채 체코슬로바키아의 미래에 대해 불성실하고, 배반적인 회합을 가졌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은 이제 확정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긴장의 시기에 소련 정부는 아직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소비에트에 구원을 요청하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고, 붉은 군대 전군에 대비태세를 개선하고, 기동력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우리 소비에트는 시베리아, 트랜스바이칼, 극동 전구를 제외한 전 전구에 비상대기태세를 내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9월 28일에 총참모장 샤포슈니코프 원수는 붉은 군대 전군에 새로운 상황변화가 발생할 때까지 모든 장병들은 계급고하에 관계없이 전역이 금지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9월 29일 에는 레닌그라드 , 칼리닌, 벨로루시 특별 전구, 키에프 특별전구는 예비군을 전투 동원태세로 배치하고, 새롭게 17개 저격 사단, 3개 전차 군단, 22개 전차 여단, 3개 차량화 저격 여단, 34개 항공기지를 편성하라고 지시받았다. 같은날 모스크바와 칼리는, 하르코프, 오렐, 북 코카서스, 볼가, 우랄 전구의 군사 평의회는 각 사단별로 정치 장교를 증원하라고 지시받았고, 대략 250-275/ 사단 정도의 인원이었다. 새롭게 시행된 동원령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소비에트에 파견된 프랑스군 연락관들에게도 알려졌다.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기 위한 소비에트의 노력은 국경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랄과 볼가를 잇는 유럽러시아 전체가 동원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당-정치국사이의 유기적인 연결과 지역 군구와 사령부, 하급제대간의 폭넓으면서, 유기적인 연결시스템과 광범위한 대비태세가 완비되었다. 일선의 모든 부대들이 전투 대비태세를 갖추고 국경을 따라 배치되고, 즉각적인 반응태세를 당과 정부의 지도아래 갖추었다. 소비에트 정부와 군사위원회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고자 하는 형제애적인 노력은 범국가적인 거대한 것이었다. 여기에 남서부와 서부 국경에 제 2선 병력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30개 저격 사단, 6개 기병사단, 2개 전차 군단, 15개 독립 전차 여단, 34개 항공기지등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도합 33만명의 예비병력이 지휘, 정치, 초급등의 부서로 나뉘어 야전 전력으로 배치되었다. 여기에 각자의 지역에서 복무하던 수십만의 초급장교들의 전역이 중단되었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이 가깝던 키에프 특별전구에는 인원과 수송물자 항공전력의 두드러지게 보강되었다.

1938년 가을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뮌헨에서 4개국 거두들이 야합한 비열한 결정을 거부할 힘이 있었다. 그들의 국민과 군, 소비에트의 지원뿐만이 아니라, 팟쇼를 거부하는 전세계적인 인민들은 모두 체코 정부가 독일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국가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싸워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실제 팟쇼 독일과 체코의 전력을 비교해 보아도 체코가 전혀 밀릴게 없었다. 팟쇼 독일은 청색 계획에 따라 그들이 보유한 47개 사단 병력중에 39개 사단을 체코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에 반해 45개 사단 약 200만의 병력을 동원할수 있었고, 500대의 전투기가 있었으며, 47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4200-5700문의 각종구경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체코의 병사들은 팟쇼 독일의 침략에 대비해 견고한 국경 요새 구역을 의지해 싸울수 있었다. 팟쇼들이 침략한다면, 체코는 히틀러가 계산에 넣지 못한 또 하나의 잇점이 있었다. 이것은 체코군의 정신적인 우월감이다. 모든 체코 인민들과 장군들, 말단 병사들까지 자신들을 노예화 하려는 팟쇼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1938년 9월 23일 22시에 동원령이 선포되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체코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예비군 병영으로 모여들었다. 동원령은 계획에 따라 엄격하게 이루어졌고, 9월 29일에 완료되었다. 나치들이 구상한 폴란드와 헝가리를 체코에 대한 전쟁에 끌어들인다는 것도 전혀 근거없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 장군들에게 체코에 대한 나치의 계획은 하나의 기회가 아니라 하나의 재앙일 것이라 인식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근거로서 나치 수괴중의 한명인 카이텔은 전후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우리는 군사적인 행동을 취할 어떤 예비 전력이 없었다. 우리는 체코의 요새지대를 돌파할 전력이 전무했다. 여기에 우리는 서부 국경에 전혀 병력이 없었다.’ 고 증언했다.

강력한 군대와 체코슬로바키아 인민의 저항의지에도 불구하고, 또 형제국가를 돕는다는 소비에트의 성의에도 아랑곳 없이 부패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부르조아 정부는 국가의 이익을 버리고, 뮌헨에서의 제국주의자들의 야합에 굴복해버렸다. 이것은 반 국가적이며, 반 소비에트적인 체코슬로바키아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소비에트와 통하는 통로를 닫아 버리고, 나치가 자신들의 국가를 점령할 통로를 활짝 열어버리는 배신행위를 자행했다. 그럼에도 우리 소비에트 군대는 1938년 10월까지 형제국가인 체코를 돕기위해 국경에 주둔하다가, 철군해서 영구진지로 돌아왔다. 당연히 체코 민중은 비열한 정부의 결정에 만족하지 않았다. 체코 공산당은 팟쇼에 대한 굴복을 거부하고, 만장일치로 소비에트군과 함께 독일에 투쟁한다고 선언했다.

뮌헨에서의 야합과 굴복은 1938년 봄에 팟쇼 독일과 이탈리아의 일련의 침략행위로서 유럽에 결과를 드러냈다. 스페인 공화국의 억압, 체코의 완전병합, 메멜의 탈취, 팟쇼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점령, 루마니아에 대한 독일의 일방적인 경제 수탈로 이어졌고, 이것은 유럽대륙 전체에 전쟁에 대한 전주곡으로 공포의 전야를 예고하는 것이었다.